파나소닉은 이전에도 4680 생산 일정을 늦춘 적이 있다. 2023년 로이터 보도에 따르면 파나소닉은 셀 성능 개선 조치를 도입하기 위해 4680 상업 생산 시점을 2024년 4~9월 기간으로 미뤘다 . 당시에는 제품 성능이나 제조 공정의 완성도를 더 끌어올리는 문제가 중심이었다.
하지만 최근 보도된 지연의 성격은 다르다. 2026년 5월 Just Auto는 닛케이아시아 보도를 인용해, 파나소닉 에너지가 핵심 고객의 확정 구매 주문을 아직 받지 못해 4680 대량 생산을 연기했다고 전했다 .
이 차이는 중요하다. 성능 개선 때문에 미뤄진 것이라면 “셀이나 공정이 아직 더 다듬어져야 한다”는 뜻에 가깝다. 반면 확정 주문이 없다는 것은 공장이 기술적으로 준비돼 있더라도, 고정비와 생산량을 감당할 만큼의 사업성이 아직 확정되지 않았다는 뜻이다. 제공된 자료만으로는 어떤 기술 조건, 가격 조건, 일정, 물량 조건이 마지막 걸림돌인지 확인할 수 없다. 따라서 이번 지연을 특정한 셀 성능 실패로 단정하는 것은 이르다.
파나소닉 4680 로드맵에서 와카야마 공장은 핵심 거점이다. 로이터 계열 보도에 따르면 파나소닉 에너지는 일본 와카야마현의 개조된 공장에서 고용량 EV 배터리 대량 생산 준비를 마쳤고, 이 공장은 4680 셀의 주력 생산지로 지정됐다 . 다른 보도 역시 고객 승인 이후 생산이 시작될 예정이며, 연간 생산능력은 수 기가와트시(GWh) 규모로 계획됐다고 전했다
.
즉 관문은 두 개다. 첫 번째는 제조 준비다. 설비, 라인 세팅, 인력, 샘플 생산이 여기에 해당한다. 두 번째는 상업 출시다. 고객 승인, 구매 주문, 확정 물량, 납품 일정이 필요하다. 최근의 “주문 미도착” 보도는 와카야마가 첫 번째 관문이 아니라 두 번째 관문에서 멈춰 있다는 신호로 볼 수 있다 .
배터리 산업에서는 이 차이가 크다. 파일럿 생산이나 샘플 생산은 “만들 수 있다”는 증명에 가깝지만, 본격 양산은 “팔 곳과 가격, 물량, 일정이 확정됐다”는 증명에 가깝기 때문이다.
테슬라가 중요하게 거론되는 이유는 간단하다. 파나소닉은 테슬라에 배터리를 공급해온 업체이고, 테슬라는 4680 포맷을 적극적으로 밀어온 대표적 완성차 업체 중 하나다 . 파나소닉이 말하는 4680의 전략적 매력도 크다. 회사는 4680 셀이 기존의 더 작은 2170 원통형 셀보다 약 5배의 용량을 가진다고 설명해왔다
.
와카야마 입장에서 대형 완성차 업체의 승인은 단순한 형식 절차가 아니다. 파나소닉은 앞서 4680 샘플 셀을 완성차 고객들에게 보냈고, 생산은 고객 승인 이후 시작될 예정이었다 . 만약 지연의 핵심 고객 결정이 테슬라와 연결돼 있다면 효과는 분명하다. 와카야마는 준비 또는 샘플 단계에 머물 수 있지만, 물량·일정·수익성을 확정해주는 주문 없이는 예측 가능한 대량 생산으로 넘어가기 어렵다.
다만 현재 제공된 자료가 뒷받침하는 것은 “핵심 고객의 확정 주문이 아직 오지 않았다”는 점이다 . 테슬라가 어떤 세부 기준을 놓고 평가 중인지, 또는 기술·가격·일정 중 무엇이 최종 승인 조건인지는 공개된 자료만으로 확인되지 않는다.
파나소닉이 데이터센터용 에너지저장에 더 주목하는 배경은 수요의 질이 달라졌기 때문이다. 파나소닉 에너지의 2025년 통합보고서에 따르면 EV 시장 성장 둔화 속에서 북미 생산 배터리 셀 수요는 견조했지만, 차량용 사업 전체는 전년 대비 20% 감소한 4,812억 엔을 기록했다 . The Star도 파나소닉 에너지의 지난 회계연도 이익이 42% 줄었고, 이는 산업·소비자용 저장장치의 이익 증가보다 차량용 배터리 이익 감소가 더 컸기 때문이라고 보도했다
.
반대로 데이터센터 쪽은 힘을 받고 있다. 파나소닉의 2024년 통합보고서는 생성형 AI 시장 확대에 따라 데이터센터용 축전 시스템 판매가 강세를 보였고, 회사가 데이터센터용 전원공급 시스템의 대량 생산을 시작했다고 밝혔다 . 파나소닉은 또한 미국과 일본 일부 공장에서 강한 수요에 대응해 데이터센터용 배터리 셀을 만들고 있다고 설명했다
. 닛케이 보도를 전한 Tiger Brokers는 파나소닉이 정전이나 전력 피크 시간대에 데이터센터 운영을 지원하는 랙 장착형 저장 시스템을 공급한다고 전했다
.
쉽게 말하면, EV 쪽에서는 모델 출시 일정, 고객 승인, 배터리 조달 계획이 맞물려야 생산량이 크게 늘어난다. 반면 데이터센터는 생성형 AI 확산으로 전력 백업과 에너지 관리 수요가 빠르게 커지고 있다. 파나소닉 입장에서는 기다리는 EV 물량만 바라보기보다, 당장 수요가 보이는 저장장치 시장으로 배터리 역량을 활용할 이유가 생긴 셈이다.
이 흐름은 파나소닉만의 문제가 아니다. S&P Global은 완성차 업체와 배터리 공급사들이 정책 변화와 수요 변화 속에서 EV 계획을 축소하거나 재조정하고, 남는 배터리 생산능력을 더 빠르게 성장하는 에너지저장 시장으로 돌리는 흐름을 설명했다 .
그렇다고 파나소닉이 EV 배터리를 포기했다는 뜻은 아니다. 회사는 여전히 와카야마를 4680 생산 거점으로 준비해왔고, 북미 배터리 수요가 견조하다는 점도 보고서에서 언급했다 . 다만 한 가지는 분명해졌다. 특정 EV 프로그램의 승인과 주문을 기다리는 동안, 데이터센터 에너지저장은 단순한 보조 시장이 아니라 생산능력을 흡수할 수 있는 현실적인 대안이 되고 있다.
첫 번째 신호는 와카야마 4680 셀에 대한 고객 승인 또는 확정 구매 주문이다. 이 신호가 나오기 전까지 파나소닉은 “라인은 준비됐다”고 말할 수 있어도, 투자자와 고객은 완전한 상업 양산이 실제로 시작됐다는 증거를 보기 어렵다 .
두 번째 신호는 생산능력 배분이다. 파나소닉이 데이터센터 저장장치용 배터리 생산을 계속 늘리거나 EV 배터리 라인의 일부를 저장 시스템 쪽으로 우선 배정한다면, AI 인프라가 배터리 생산능력의 의미 있는 경쟁 수요처가 됐다는 뜻으로 읽힐 수 있다 .
테슬라 관점에서 보면 와카야마에서 나오는 외부 4680 공급 확대는 여전히 조건부다. 파나소닉 관점에서는 전략이 더 유연해졌다. 4680 옵션은 살려두되, EV 수요와 고객 승인이 느리게 움직이는 동안 데이터센터 에너지저장으로 배터리 생산능력을 활용하는 그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