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동 성명은 발표되지 않았으며, 공개된 정보만으로는 가장 어려운 현안들에 진전이 있었다고 보기 어렵다. 공개적으로 드러난 이번 회담의 가치는 핵심 분쟁 해결보다는, 소통 단절이라는 최악의 시나리오를 막았다는 점에 있다.
하지예프와 그리고리안이 진척시키려 애쓰는 평화의 틀은 분명한 텍스트로 존재한다. “아르메니아 공화국과 아제르바이잔 공화국 간 평화 및 국가 간 관계 수립에 관한 협정” 이 바로 그것이다 :
2025년 8월 가서명 이후 진전은 ‘산발적이고 더디게’ 진행되어 왔다 . 외교적 에너지는 더 이상 조약 문안을 다듬는 데 소모되지 않고 있으며, 이행을 위한 전제 조건을 맞추는 쪽으로 이동했다. 바로 이 지점이 진짜 난관이다.
전문가 분석과 공식 성명을 종합하면, 어느 한쪽도 최종 서명에 나서지 못하는 이유는 다음 네 가지 얽히고설킨 분쟁 때문이다.
아제르바이잔이 내세운 가장 눈에 띄는 전제 조건은, 아르메니아 헌법에 배어 있다는 ‘영토적 주장’을 제거해야 한다는 점이다. 특히 나고르노-카라바흐를 아르메니아와 통일하겠다는 취지의 조항을 문제 삼고 있다 . 제이훈 바이라모프 아제르바이잔 외무장관을 비롯한 관료들은 “국민투표 없이는 서명도 없다”는 입장을 거듭 밝혀왔다
.
아르메니아 지도부는 개헌 논의 자체는 인정하지만, 현행 헌법이 실제 평화 협정의 걸림돌이 되는지는 동의하지 않고 있으며, 국민투표를 위한 구체적인 시한을 제시하지도 못하고 있다 . 이런 국내적 망설임은 2026년 6월 7일경으로 예상되는 아르메니아 총선 일정 때문에 더욱 심각한 문제가 된다. 개헌 국민투표를 치를 수 있는 기회는 총선 직후 매우 좁은 시간 속에 갇혀 버린 셈이다
.
협정 초안은 옛 소비에트 행정 경계를 국제 국경으로 인정한다는 원칙을 담고 있다. 그러나 실제 경계선을 지도에 그리고 땅에 말뚝을 박는 ‘획정 및 경계 표지(delimitation and demarcation)’ 작업은 미래의 양자 위원회에 맡기며, 그 위원회의 권한, 운영 규칙, 일정은 아직 약속조차 안 된 상태로 남겨두었다 . 국경 문제를 협정 서명에서 분리하자는 명시적 입장은 이미 2024년부터 아제르바이잔 쪽에서 밝혀온 방식이다
. 이로 인해 물리적 국경선이 확정되지 않은 채 협정만 먼저 서명할 수도 있지만, 그 모호함 자체가 또 다른 갈등의 불씨로 자리 잡고 있다.
협정에서 지정학적으로 가장 뜨거운 조항 중 하나는 미국에게 아르메니아 영토를 통과하는 교통로, 일명 잔게주르 회랑(Zangezur corridor) 또는 TRIPP(초국경 인프라 및 번영 프로젝트)에 대한 독점적 개발권을 부여한 부분이다 . 그러나 정작 세부 규정은 구멍이 숭숭 뚫려 있다. 통관 절차, 통행료 배분, 화물 보안 관할권, 운영 주체의 법적 지위 등 아무것도 합의되지 않았다
. 아제르바이잔은 이 통로를 분리된 나흐츠반 자치 공화국과 본토를 잇는 ‘주권적 권리’이자 경제 대동맥으로 간주한다. 아르메니아는 명확한 제한 없이 영토의 전략적 통제권을 넘겨줄 수 없다며 버티고 있다.
공개된 조약문은 아르메니아-아제르바이잔 국경선을 따라 제3국 인력 배치를 금지하고 있다 . 이는 국제 감시단, 평화유지군, 그리고 사실상 활동이 중단된 유럽안보협력기구(OSCE) 민스크 그룹의 잔여 구조까지 모두 겨냥한 것이다. 하지만 회랑 문제처럼, 이 또한 ‘실행 방안(modalities)’을 추후 협상으로 미뤄두면서, 문서상의 금지 조항과 현실에서 누가 어떻게 준수 여부를 감시할 것인지 사이에 커다란 간극을 만들어냈다.
그 밖에도 실종자 처리 절차, 양자 감독 위원회의 운영 규칙, 그리고 아제르바이잔이 줄기차게 요구해온 민스크 그룹의 공식 해체 등 미완의 기술적 과제들이 산적해 있다 . 이들 문제는 기술적으로는 풀 수 있지만, 정치적으로는 네 가지 핵심 쟁점에 단단히 묶여 있다.
딜리잔 회담은 2025년 말부터 이어진 일련의 실무 접촉 중 가장 최근의 연결 고리다 . 하지예프와 그리고리안은 서로 다른 정치적 공간 속에서 합의의 틈이 넓어지는지 좁아지는지를 시험하는 백채널 외교의 상수로 자리 잡았다.
전체 일정을 보면, 극적으로 문안에 속도를 냈다가 이행 단계에서 벽에 부딪힌 전형적인 패턴이 보인다:
외부 관측통들에게 패턴은 분명하다. 두 정부는 작동하는 소통 채널을 구축했고, 차마 버리지 못할 만큼 공들인 협정문을 확보했지만, 국내 정치적 유인이 정렬되지 않으면 남은 간극을 메울 수 없거나, 또는 메울 의지가 없는 상태다. 아르메니아의 선거 주기는 아제르바이잔의 개헌 요구와 맞물려, ‘내용’ 못지않게 ‘타이밍’을 둘러싼 고위험 줄다리기를 만들어내고 있다.
딜리잔 회담은 근본적 판세를 바꾸지 못했지만, 시간을 벌었다. 차기 회담은 아제르바이잔 땅에서 열리기로 합의됐는데, 그 자체로 작은 신뢰 구축 신호다 . 이 회담이 교착 상태를 깰 수 있을지는 두 가지에 달려 있다. 총선 이후 아르메니아 정부가 국민투표를 밀어붙일 정치적 자본과 개헌 로드맵을 확보할 수 있을지, 그리고 아제르바이잔이 협정 서명과 국민투표 완료를 분리하는 순차적 이행 시나리오를 받아들일지 여부다.
만약 그들이 성공한다면, 남카프카스는 소비에트 연방 해체 이후 아르메니아와 아제르바이잔 사이에 맺어지는 첫 공식 평화 협정을 맞이하게 된다. 실패한다면, 가서명된 합의문은 정치적 수사로만 의미 있고 법적으로는 무력한 장식품으로 전락할 위험을 안는다. 그 빈자리는 국경, 통행권, 안보를 둘러싼 해묵은 분쟁이 더 큰 충돌로 비화할 가능성으로 채워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