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오도로 장관은 초강대국들이 군사적 패리티에 도달하면 자연스럽게 긴장 완화를 모색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인정하면서도, 정작 남중국해 현장의 현실은 전혀 다르다고 지적했다 . 그의 말처럼, 2012년 이후 사실상(de facto) 중국의 통제 아래 들어간 스카버러 환초(필리핀명 파나타그 환초, 중국명 황옌다오) 주변에서는 물대포 충돌, 해상 차단막 설치, 해경의 일상적인 순찰을 통한 길들이기가 끊이지 않고 있다
. 이는 강대국 정치의 온도 변화가 소규모 연안국들의 현장 안보에는 즉각 반영되지 않는다는 점을 여실히 보여준다.
필리핀의 경고는 단 하루 만에 현실이 되었다. 5월 31일, 중국 인민해방군 남부전구 사령부와 중국 해경은 각각 성명을 내고 스카버러 환초 주변 해역과 영공에서 **'전투 준비 순찰(combat readiness patrols)'**과 법 집행 순찰을 실시했다고 발표했다 . 이 순찰은 샹그릴라 대화가 한창 진행 중인 바로 그 시간에 이루어졌으며, 당국은 이를 **"각종 권익 침해 및 도발 행위에 대응하기 위한 효과적인 반격 조치"**라고 규정했다
.
이러한 중국의 신속 대응은 즉흥적인 감정적 행동이 아니라, 오랜 기간 치밀하게 준비된 전략의 연장선이다. CSIS의 아시아해양투명성이니셔티브(AMTI)가 발표한 데이터에 따르면, 2025년 한 해 동안 중국 해경이 스카버러 환초에서 기록한 순찰일은 352일로 2024년(516척-일 기반)보다 두 배 이상 급증했다 . AMTI는 이를 두고 중국이 남중국해 전체에 분산되어 있던 해경 자원을 스카버러 환초와 사비나 환초(시안빈자오)에 집중 배치하는 **"중대한 전환(major shift)"**을 단행했다고 분석했다
. 이곳은 이제 단순한 암초가 아니라, 중국이 해양 민병대와 해경, 해군력을 동원해 '실효적 지배'를 완성해 가는 전략적 거점인 셈이다.
같은 날 기조연설에 나선 피트 헤그세스(Pete Hegseth) 미국 국방전쟁장관의 메시지는 더욱 직설적이었다. 그는 중국의 군사적 팽창에 대해 **"정당한 경각심(rightful alarm)"**을 표하며, 인도-태평양 동맹과 파트너 국가들이 GDP(국내총생산)의 3.5%를 국방비로 지출할 것을 공개적으로 요구했다 .
이는 전통적 안보 지원 요청을 넘어선, 동맹의 근본적 재구성을 압박하는 메시지였다. 헤그세스 장관은 "아시아·태평양 지역이 어떠한 패권국에도 지배받지 않도록 하는 것이 핵심"이라며, 앞으로는 부유한 동맹국들이 무임승차하지 않고 **'진정한 파트너(true partners)'**로서 책임을 분담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 1조 5000억 달러에 달하는 미국 자체의 국방비 투자를 강조하며, 무한정 미국의 군사력에 기대는 것은 **"미국 납세자에게 나쁜 거래일 뿐 아니라 동맹국을 위한 지속 불가능한 목발(unsustainable crutch)"**일 뿐이라고 일갈한 것이다
.
이는 작은 해양 분쟁에 그치지 않고, 미국이 주도하는 동맹 네트워크의 근본적인 부담 분담 프레임을 재설정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번 샹그릴라 대화의 파열음은 단순한 해프닝이 아니라, 수십 년째 이어져 온 남중국해 갈등의 축소판이다. 스카버러 환초는 필리핀의 배타적 경제수역(EEZ) 안에 있지만, 베이징은 '구단선(九段線)'과 역사적 권리를 근거로 영유권을 주장한다 . 2016년 헤이그 상설중재재판소(PCA)가 필리핀의 손을 들어주며 중국의 구단선 주장은 국제법상 근거가 없다고 판결했지만, 베이징은 이를 '휴지 조각'이라며 인정하지 않고 있다
.
그 사이 법적·외교적 공백을 메우는 것은 힘의 논리다. 아세안(ASEAN)과 중국이 수년째 협상 중인 '남중국해 행동규범(CoC)'은 좀처럼 진전을 보지 못하고 있는 가운데, 현장에서는 해경 함정의 거리 경쟁과 인공 구조물 건설만이 가속화되고 있다. 이번 사태가 보여주듯, 미증유의 초강대국 간 정상회담조차도 스카버러 환초의 긴장을 녹이지 못하는 현실은 동아시아 안보 지형의 구조적 모순을 다시 한번 적나라하게 드러냈다.
스카버러 환초 문제는 이제 단순한 해결될 분쟁이 아니라, 강대국 간 힘의 역학과 소규모 국가들의 실존적 위협 인식이 끊임없이 충돌하는 만성적 진통으로 자리 잡고 있다. 그리고 이 진통은 갈수록 거세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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