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무라 사장의 전략은 의외로 단순하다. 수직계열화된 니콘의 제조 역량을 활용해 '가성비'로 승부하겠다는 것이다. 그는 일본 닛케이신문과의 인터뷰에서 "우리는 가격 경쟁을 할 수 있다. 설사 가격을 낮추더라도 여전히 괜찮은 이익을 확보할 수 있다"고 자신감을 내비쳤다 .
이러한 자신감의 근원은 바로 니콘이 자체 생산하는 핵심 부품, 특히 광학 렌즈 기술에 있다. ASML이 EUV용 광학계를 위해 Carl Zeiss 등 복잡한 외부 공급망에 의존하는 것과 달리, 니콘은 렌즈 시스템을 대부분 내재화하고 있다. 이러한 구조적 원가 우위 덕분에 20~30% 할인된 가격에도 충분한 수익성을 낼 수 있다는 것이 니콘 측의 판단이다 .
공장 한 채를 짓는 대규모 반도체 설비 투자(Fab)의 특성상, 장비 당 수백억 원에 달하는 이 같은 할인율은 구매 결정에 있어 무시할 수 없는 유인책이다. 여기에 니콘은 단순히 값만 깎는 전략을 구사하지 않는다. 이른바 '생태계 호환성' 카드를 함께 꺼내들었다.
니콘은 현재 ASML 장비와의 호환성을 염두에 둔 새로운 ArF 침지 노광 시스템을 개발 중이며, 주요 반도체 제조사에 2027년까지 프로토타입(시제품)을 공급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 . 동시에 2026 회계연도 내에는 차세대 건식 ArF 장비인 'NSR-S333F'의 첫 상업 출하를 계획하고 있다
. 이미 ASML 중심으로 구축된 생산 라인에 니콘 장비를 큰 공정 변경 없이 '플러그 앤 플레이' 방식으로 붙일 수 있다면, 가격 메리트는 더욱 강력한 무기가 된다.
오무라식 가격 인하는 단순한 야망이 아닌, 네 가지 압력이 만들어내 생존 전략이다.
1. 인텔이라는 감옥. 니콘의 반도체 장비 사업은 유독 인텔이라는 단일 고객사에 과도하게 의존해왔다. 오무라 CEO 스스로도 "인텔 외에는 충분한 납품 실적이 없어, 시장이 우리의 지원 역량을 아직 신뢰하지 못하고 있다"고 토로할 정도다 . 이렇게 편중된 포트폴리오는 치명적이다. 2026년 3월까지의 6개월간 니콘이 출하한 노광 장비는 고작 9대에 그쳤고, 그것마저도 최첨단 공정이 아닌 구형(Mature) 공정용 장비였다. 반면 ASML은 2025년 한 해 동안 327대를 팔아치웠고, 여기에는 대당 2천억 원이 훌쩍 넘는 최첨단 EUV 장비 48대가 포함됐다
.
2. 회사 100년 역사상 최악의 재무 위기. 니콘이 예고한 8,500억엔의 대규모 손실은 디지털카메라로 대표되는 '이미징' 사업 부문의 구조적 쇠퇴와 맞물려 있다. 경영진은 장기 침체의 돌파구로 반도체 노광 장비가 주축이 된 '정밀기기' 사업을 택했으며, 신임 CEO가 수립한 '중기 경영 계획'(2026년 4월~2031년 3월)의 성패는 여기에 달렸다 .
3. ASML에 대한 수출 규제가 만든 빈틈. 2024년부터 시행된 네덜란드 정부의 대중국 수출 통제로 인해, ASML은 자사의 최신 침지 노광 장비인 NXT:2050i 및 NXT:2100i를 중국에 사실상 팔 수 없게 되었다. 그 여파로 ASML의 전체 매출에서 중국이 차지하는 비중은 2024년 33%에서 2026년 20% 수준으로 급감할 전망이다 . 세계 최대 반도체 시장인 중국의 성숙·중급 공정용 수요는 여전히 건재한 상황. 수출 제재에서 자유로운 니콘의 저가형 ArF 장비가 이 빈자리를 노리기에 이보다 더 좋은 타이밍은 없다.
4. 냉철한 현실 인식. 오무라 CEO의 발언은 매우 현실적이다. 그는 니콘이 ASML을 추월할 것이라고 주장하지 않는다. "살아남고, 인텔 외의 고객을 확보하며, 낮은 가격대에서도 괜찮은 이익을 내는 회사가 되겠다"는 것이다. 한때 글로벌 노광 장비 시장을 군림했다가 20년 만에 점유율이 증발한 기업에게, 이 정도의 복귀만으로도 충분히 야심 찬 계획인 셈이다.
양사의 실적을 숫자로 비교해보면 이것이 전혀 다른 체급의 싸움임을 금방 알 수 있다.
견고한 요새, ASML. 2025년 ASML은 총매출 327억 유로(약 48조 원)에 총이익률 52.8%를 기록하며 96억 유로(약 14조 원)의 순이익을 냈다 . 2025년 말 기준 EUV 장비의 수주 잔액(백로그)만 388억 유로(약 57조 원)에 달해, 앞으로 수년간의 실적이 이미 보장된 상태다
. 2026년 4월에는 AI 인프라 투자 붐에 힘입어 연간 매출 전망치를 360억
400억 유로로 상향 조정하기도 했다. 이는 전년 대비 최대 22% 성장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다 600억 유로, 총이익률은 56~60%에 달한다 . 2030년 매출 목표는 440억
.
ASML의 경쟁력은 단순한 돈이 아닌 '기술 필수 불가결성'에서 나온다. 자사의 High-NA EUV 장비 (Twinscan EXE:5200)만이 2nm 이하 공정의 인공지능(AI) 가속기, 양자 컴퓨팅 칩을 양산할 수 있는 유일한 솔루션이기 때문이다 . 4만 2천 명이 넘는 특수 인력과 독점적인 미러·광원·진공시스템 공급망을 갖춘 ASML의 해자는 어떤 경쟁자도 감히 넘볼 수 없다.
니콘의 현실. 반면 니콘은 최근 고객 투자 지연으로 연간 매출 전망치를 250억 엔(약 2,400억 원) 하향 조정한 7,250억 엔(약 7조 원)에 불과하다 . 이는 첨단 장비뿐 아니라 니콘의 주력 사업 부문을 모두 포함한 수치이며, 노광 장비 사업부는 이중 극히 일부분을 차지할 뿐이다. 수익성은 공개된 바 없지만, 기록적인 전체 손실 규모가 말해주듯 현재 판매량으로는 적자를 면치 못하는 구조임을 알 수 있다.
니콘의 ArF 침지 분야 가격 공세는 ASML을 향한 전면전이 아닌, 기업의 사활을 건 '틈새 생존 전략'으로 봐야 하는 이유다.
니콘의 '가성비 전쟁'은 일정 부분 성과를 거둘 가능성이 충분하다. 주요 반도체 기업들을 대상으로 한 할인 공세로 몇 건의 수주만 따내도, 인텔 이외의 고객사 레퍼런스를 확보하고 성숙 공정 장비 시장에서 신뢰 회복의 발판을 마련할 수 있다. 특히 ASML의 공급 제약에서 자유로운 중국 시장은 가격에 민감한 수요층을 확실히 제공할 것이다.
하지만 분명히 해야 할 점은, 이 전쟁이 ASML의 핵심 비즈니스 모델을 위협할 수는 없다는 사실이다. 대당 2천억 원에서 5천억 원에 달하는 ASML의 EUV 장비를 향한 수요는 TSMC, 삼성전자, 인텔 등 글로벌 3사의 로드맵에 의해 굳건히 뒷받침된다 . 니콘이 ArF 침지 시장을 100% 점유한다고 해도, 그 전체 파이는 ASML의 EUV를 포함한 총매출액의 극히 일부분에 지나지 않는다. 노광 장비 산업의 이익은 압도적으로 EUV 쪽에 집중되어 있기 때문이다.
니콘이 잃어버린 20년을 되찾기 위해 내민 승부수는, 결국 다른 체급의 선수에게 가볍게 흔들어 보인 거대한 기함의 '그림자 복싱(shadow boxing)'에 가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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