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독수리 훈장은 폴란드가 자랑하는 가장 오래되고 권위 있는 최고 등급의 국가 서훈이다. 젤렌스키는 2023년 4월 5일 바르샤바를 국빈 방문했을 당시 안제이 두다 전임 대통령으로부터 이 훈장을 받은 바 있다 . 그 영광의 현장이 불과 3년 만에 정치적 철퇴의 중심으로 돌변한 셈이다.
나브로츠키 대통령은 이날 "분노"라는 단어까지 써가며 이번 법령을 규탄했다. 그는 "젤렌스키 대통령은 정신적으로 우크라이나가 유럽의 가족이 될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는 것을 증명해 버렸다"라는, 외교적 수사로는 매우 파격적인 직설 화법까지 동원했다 .
또한 그는 "UPA를 영웅시하는 행위는 러시아 프로파간다에 막대한 양의 가짜 뉴스 산소를 공급하는 꼴"이라며, 이 문제가 단순한 과거사 차원을 넘어 정보전의 영역까지 번지고 있음을 경고했다 .
하지만 나브로츠키 대통령은 대러시아 지원이라는 전략적 기조 자체는 흔들리지 않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역사의 그림자를 외면하지 않으면서도 현재 진행형인 전장의 현실을 외면할 수 없는, 묘한 외교적 긴장감이 고스란히 드러난 대목이다.
이번 사태가 기존의 역사 마찰과 결정적으로 다른 지점은 폴란드 국론이 하나로 수렴된 속도와 강도다. 보수 진영에서 자유주의 진영까지, 대통령부터 총리까지, 모두가 같은 방향을 향해 목소리를 높였다.
외교부는 5월 29일 공식 성명을 발표하고 이번 결정에 대해 "분개(indignant)"한다는 표현을 썼다. 외교부는 이번 명명이 "매우 유감스러운 선택"이며 "희생자들의 기억에 상처를 입히고 양국 간 대화를 강타하는 행위"라고 규정했다. 또한 이 결정이 "러시아의 선전(프로파간다)에 의해 폴란드-우크라이나 관계 약화 및 전략적 협력 관계 훼손에 악용될 수 있다"는 전략적 경고를 첨부했다 .
마르친 보사츠키 국무장관은 5월 28일 바실 보드나르 주폴란드 우크라이나 대사를 외교부로 불러들여 "심각한 불만족"을 직접 전달했다. 같은 날 키이우 현지에서는 피오트르 우카시에비치 폴란드 대리대사가 올렉산드르 미셴코 우크라이나 외무차관을 만나 동일한 항의 뜻을 재차 통보했다 .
도널드 투스크 총리는 하원 연설에서 젤렌스키의 조치가 "우리의 역사적 감수성에 상처를 입혔다"고 말했으며, 이는 "양국 관계의 안보 관점에서 몹시 우려스러운 일"이라고 밝혔다 . 투스크 총리는 이러한 조치의 결과로 우크라이나 대사가 공식 소환되었음을 직접 확인해 주었다
.
가장 극적인 반응은 아마도 레흐 바웬사 전 대통령에게서 나왔을 것이다. 노벨 평화상 수상자이자 동유럽 공산권 붕괴의 상징인 그가 보인 행동은 단순한 정치적 성명을 넘어서는 '감정의 정치학' 그 자체였다.
바웬사 전 대통령은 5월 28일 자신의 페이스북에 올린 글에서 이렇게 적었다. "우크라이나 대통령은 UPA라는 도적 떼를 명예롭게 함으로써 나에게, 그리고 살해된 우리의 모든 동포들에게 모욕을 주었다" .
그의 다음 문장은 폴란드 전역의 뉴스 불레틴과 포털 사이트 메인을 장식했다. "이에 나는 가슴에 달고 있던 우크라이나 국기를 공개적으로 떼어냈다". 바웬사는 2022년 2월 러시아 침공이 시작된 이후 줄곧 이 국기 배지를 달고 다녔던 인물이다 . 그런 그가 전쟁 기간 내내 지켜온 상징물을 직접 떼어내는 장면은 폴란드 사회에 큰 파장을 불러왔다.
하지만 바웬사는 감정과 이성을 교묘히 분리하는 노련한 정치인의 면모도 보여줬다. "나는 계속해서 소비에트(러시아)와 싸우는 우크라이나 민족을 도울 것이다. 그러나 젤렌스키 대통령에 대한 지지는 거부한다!" . 이 발언은 민족과 지도자, 현재의 전쟁과 과거의 학살을 정치적으로 분리함으로써, 폴란드 내 친(親)우크라이나 민심이 급속히 이탈하는 것을 막으려는 의도로 읽혔다.
폴란드와 우크라이나는 이전에도 역사 문제, 특히 볼히니아 사건의 진상 규명과 유해 발굴 문제를 두고 수차례 갈등을 빚어왔다. 하지만 이번 위기는 세 가지 측면에서 근본적으로 다르다.
첫째, 이번 법령은 지역 정치인이나 군소 민족주의 단체가 아닌 전시 국가원수인 젤렌스키 본인이 주도한 국가적 행위였다. 과거 UPA를 찬양하는 듯한 움직임들은 대개 '비공식적'이거나 '일탈적'인 것으로 치부될 수 있었지만, 이번엔 국가 수반의 서명이 담긴 공식 문서가 존재했다. 폴란드 정치인들이 이를 '무시할 수 없는 사건'으로 간주한 이유다.
둘째, 대응의 속도와 범위가 전례 없이 기관 통합적이었다. 통상 역사 문제가 불거지면 정부가 우려를 표명하는 동안 야당이 침묵하거나, 그 반대의 상황이 펼쳐지곤 했다. 하지만 이번에는 대통령실, 총리실, 외교부가 동시에 움직였으며, 몇 시간 뒤에는 폴란드 민주화의 아이콘인 바웬사 전 대통령까지 그 대열에 합류했다. 이는 단순한 정치적 쇼가 아니라, 폴란드 사회 저변에 깔린 집단 기억이 건드려졌음을 의미한다.
셋째, 전쟁 중인 동맹국이라는 특수성이다. 폴란드는 2022년 이후 서방의 군수 물자가 우크라이나로 들어가는 핵심 허브 역할을 해왔고, 약 230만 명에 달하는 우크라이나 난민을 수용하며 사실상 전쟁의 제2 전선을 지탱해왔다. 양국 관계가 삐걱거리는 순간, 이 거대한 지원 체계 전체가 영향권에 들 수 있다. 실제로 폴란드 외교부가 러시아가 이 틈새를 정보전에 활용할 것이라 경고한 것은 단순한 수사가 아닌, 실질적인 안보 인식에서 비롯된 것이다 .
백독수리 훈장 위원회는 오는 6월 8일 소집된다. 젤렌스키가 실제로 폴란드 최고 명예를 반납하게 될지 여부는 그날 결정되겠지만, 이미 바르샤바와 키이우 사이의 심리적 회로는 심각한 손상을 입은 뒤다. 두 나라는 지금 전쟁터에서 등을 맞대고 있지만, 그 발밑에는 80년 전 핏자국으로 얼룩진 역사의 지뢰가 여전히 생생하게 묻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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