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파구는 3월, 카메룬에서 열린 세계무역기구(WTO) 회의의 부대 행사에서 마련되었다. 쇼르츠마 장관과 왕원타오(王文涛) 중국 상무부장이 만난 자리에서, 양측은 가까운 시일 내에 중국에서 경제·통상 협의를 열기로 합의했다. 당시 쇼르츠마 장관은 이 기회를 틈타 네덜란드 기업인들로 구성된 대규모 무역 사절단을 직접 이끌겠다는 의사를 내비쳤다 . 이후 4월 말, 소식통들은 중국이 쇼르츠마 장관을 자국의 제재 명단에서 조용히 삭제함으로써 5년간의 대치 상태가 막을 내렸다고 전했다
.
쇼르츠마 장관의 이번 방문 의제 중 가장 시급한 사안은 바로 미국에서 발의된 이른바 'MATCH 법안(MATCH Act)'이다. 2026년 4월, 초당파적인 미국 의원들이 발의한 이 법안은 모든 동맹국이 워싱턴의 수출 통제 정책을 그대로 따르도록 강제하는 내용을 골자로 한다. 구체적으로는, 네덜란드를 대표하는 반도체 장비 기업인 ASML이 자사의 심자외선(DUV) 액침 노광 장비를 중국 고객사에 판매하거나 유지·보수하는 행위 자체를 원천 봉쇄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
네덜란드 정부는 지난 5월, 이 법안이 자국의 수출 정책에 대한 주권을 침해하는 중대한 월권 행위라고 공식 반대 입장을 표명했다 . 쇼르츠마 장관 역시 미국 규정의 역외적 적용에 대해 내각이 단호히 반대하며, 네덜란드는 스스로의 수출 통제 권한을 행사할 것이라고 공개적으로 밝혀왔다
. 그의 이번 방문은 네덜란드 정부가 워싱턴의 압력에 단호히 맞서고 있다는 강력한 신호를 베이징에 직접 전달할 수 있는 소중한 경로다. 하지만 동시에, 네덜란드가 이전에 ASML의 최첨단 장비에 대한 미국의 수출 제한에 뜻을 같이했던 전례를 고려할 때, 이 '맞대응'이 과연 어디까지 가능할 것인지에 대한 냉철한 현실 인식도 필요함을 베이징 측에 전달해야 하는 절묘한 줄타기 외교이기도 하다
.
ASML의 CEO는 이러한 고강도 규제가 결국 중국으로 하여금 자체적인 경쟁 칩 제조 장비를 개발하도록 자극할 것이라고 경고한 바 있다. 이는 MATCH 법안의 통과 여부와 관계없이 글로벌 반도체 지형 자체를 근본적으로 재편할 수 있는 파급력 있는 전망이다 .
ASML 사안이 장기적인 구조적 문제라면, 네덜란드 네이메헌(Nijmegen)에 본사를 둔 반도체 기업 넥스페리아(Nexperia)를 둘러싼 분쟁은 당장 터질 듯한 시한폭탄과도 같다. 2025년 9월, 네덜란드 정부는 국가 안보를 이유로, 중국의 윙테크 테크놀로지(Wingtech Technology)가 소유한 넥스페리아를 "부적절한 기술 이전"이라는 의혹을 근거로 국가의 임시 감독 하에 두는 초강수를 두었다 . 이때 네덜란드 정부가 동원한 카드는 거의 사용된 적이 없는 '물자 가용법(Goods Availability Act)'이었다.
이에 대한 중국의 보복은 즉각적이고 전방위적이었다. 2025년 10월, 베이징은 중국 내에서 생산된 넥스페리아 부품에 대한 수출 통제를 단행해 전 세계 자동차 생산 라인에 큰 차질을 불러일으켰다 . 심지어 넥스페리아의 중국 자회사는 네덜란드 본사의 지시를 무시하라는 내용의 공문을 직원들에게 발송하며 사실상 경영권을 두고 내전 상태에 돌입했다
. 모기업인 윙테크는 이 사태로 인해 2025년 한 해에만 최대 19억 달러(약 2조 7천억 원 상당)의 손실이 발생할 것이라고 발표했다
.
상황은 2026년 5월, 윙테크가 넥스페리아와 핵심 임원 3명을 상대로 중국 광둥성 법원에 무려 80억 위안(한화 약 1조 4,500억 원, 미화 약 11억 7,000만 달러)의 손해배상과 경영권 전면 회복을 요구하는 소송을 제기하며 최악으로 치달았다 . 중국의 '반외국 제재법(Anti-Foreign Sanctions Law)'을 근거로 한 이 소송은, 앞서 2026년 2월 네덜란드 법원이 윙테크의 부실 경영 의혹에 대한 정식 조사 명령을 내리고, 네덜란드 정부의 개입 이후 구성된 유럽인 경영진의 지위를 인정한 것에 대한 전면적인 반격이었다
.
중국 상무부는 이 분쟁이 "새로운 글로벌 반도체 공급난을 촉발할 수 있다"고 공개적으로 경고했다. 이는 네덜란드 본사가 유럽산 웨이퍼(Wafer)를 중국 내 팹(Fab, 반도체 생산 공장)에 공급하는 것을 중단하면서, 유럽의 웨이퍼 생산과 중국의 패키징 및 테스트 공정 간 연결 고리가 완전히 끊어진 상황을 정확히 지적한 것이다 . 현재 이 분쟁은 여러 사법 관할권에 걸쳐 복잡하게 얽혀 있으며, 네덜란드 정부가 확대 일로를 걷는 양측에 자제를 촉구하는 사이, 지난 2월 부임한 신임 선보(沈波) 주네덜란드 중국 대사는 공개적으로 "헤이그가 이 소송을 취하하는 것이 문제 해결의 첫걸음"이라고 네덜란드 정부를 압박하고 있다
.
쇼르츠마 장관의 이번 중국 방문은 지난 2021년 그에 대한 제재가 가해진 이후 네덜란드 고위 장관이 처음으로 수행하는 무역 사절단이라는 역사적 의미를 지닌다. 이 방문은 옛텐 내각이 표방하는 대중국 '리스크 완화(de-risking)' 전략의 시험대이자, 중국과의 전략적 의존도를 관리하며 경제적 관계는 유지하겠다는 목표가 현실에서 얼마나 작동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리트머스 시험지와 같다. 워싱턴과 베이징의 거센 양방향 압력 속에서 그 균형을 잡기가 갈수록 어려워지고 있기 때문이다.
네덜란드는 유럽에서 가장 가치 있는 반도체 장비 회사인 ASML과 가장 분쟁이 격화된 칩 제조사 중 하나인 넥스페리아를 동시에 품고 있다. 쇼르츠마 장관이 베이징과 상하이에서 가질 일련의 회담에서 어떤 결과가 도출되든, 그 파장은 이 짧은 나흘간의 일정을 훌쩍 넘어 글로벌 공급망, 기업 이사회, 그리고 각국의 외교 전문을 뒤흔들 것이다. 양측은 경제 외교라는 실리를 위해 과거의 앙금을 덮어둘 의향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협상 테이블 위에 놓인 두 개의 거대한 난제를 생각하면, 구체적인 진전 없이 빈손으로 돌아오는 것은 그 누구에게도 용납되기 어려운 시나리오가 될 것이다.
Comments
0 commen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