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값 폭락의 가장 직접적인 방아쇠는 유럽중앙은행(ECB)의 '매파적 pivot(정책 전환)'이었다. ECB는 6월 11일, 2023년 9월 이후 처음으로 기준금리인 예금금리를 25bp(1bp=0.01%p) 인상한 2.25%로 결정했다 . 이란 리스크로 인한 에너지 가격 상승이 유로존 전역으로 퍼질 기미를 보이자, 선제적으로 인플레이션을 잡겠다는 의지의 표현이었다
. 선물 시장은 이미 99%의 확률로 이번 인상을 가격에 반영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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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NP파리바의 분석이 당시 상황을 정확히 묘사하고 있다. 4월만 해도 시기상조로 여겨졌던 금리 인상이 6월에는 "기본 옵션(default option)"이 되어버렸으며, 인플레이션 데이터가 이를 뒷받침하고 있다는 것이다. 에너지 가격이 급격하고 지속적으로 하락하지 않는 한, 금리 인상의 정당성은 더욱 굳어질 상황이었다 .
이러한 유럽의 긴축 행보는 미국 중앙은행인 연방준비제도(Fed, 연준)의 정책에도 큰 압박으로 작용했다. 시장은 연준 역시 더 높은 금리를 더 오래 유지하거나, 심지어 연내 추가 금리 인상에 나설 수 있다는 공포에 휩싸였다 . 시티 리서치는 연내 연준의 금리 인상 가능성이 단기 금값 전망을 하향 조정한 핵심 이유라고 밝혔다
. 이른바 '고금리 장기화(higher for longer)'가 금 투자 심리를 얼어붙게 만든 것이다.
금값 추락은 펀더멘털(기초 체력) 요인뿐 아니라 기술적 분석 신호가 악화되면서 더욱 가팔라졌다. 베테랑 애널리스트 에드 야데니(Ed Yardeni)는 금값이 핵심 지지선인 200일 이동평균선인 온스당 4,443.40달러를 하향 돌파한 것을 '중대한 기술적 경고'라고 진단하며, 다음 지지선은 4,000달러 선이 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
이 분석을 증명이라도 하듯, 시티 리서치는 6월 9일 금에 대한 0~3개월 단기 목표 가격을 기존 4,300달러에서 4,000달러로 대폭 하향 조정했다 . 시티는 미국의 강력한 고용 지표가 발표된 후 금값이 2023년 9월 이후 처음으로 200일 이동평균선 아래로 떨어진 점을 하향 조정의 결정적 근거로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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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다른 기술적 분석 회사인 CMC마켓츠 역시 3월 중순 이후 금 차트에서 '베어 플래그(Bear Flag, 하락 지속형 깃발 패턴)'가 형성되었으며, 상대강도지수(RSI) 약화와 변동성 감소가 동반돼 4,000달러 선 아래로 추락할 수 있다고 경고했다 . 유가 변동성, 금리 상승, 달러 강세가 맞물려 금융 여건을 압박하며 금값 상승 추세선을 완전히 무너뜨렸다는 진단이다.
금 시장을 더욱 혼란스럽게 만든 것은 중동의 지정학적 리스크였다. 통상 전쟁 리스크는 대표적인 '안전자산'인 금값을 밀어 올린다. 실제로 이번 사태에서도 그러한 안전자산 매수세가 아예 없었던 것은 아니다. 미국이 공습 종료를 선언하고 평화 협상에 대한 기대가 싹튼 6월 11일, 금값은 장중 저점인 4,023달러 근처에서 단숨에 4,133달러까지 반등하기도 했다 .
그러나 이란 리스크의 순효과(net effect)는 결국 '약세(하락)'로 귀결되었다. 전쟁이 촉발한 원유 가격 폭등이 오히려 금값을 짓누르는 두 개의 기둥이 되어버렸기 때문이다 .
평화 협상 소식마저 금에는 복잡한 영향을 주었다. 긴장 완화 소식은 유가를 낮춰 인플레이션 우려를 덜어내는 긍정적인 신호였지만, 동시에 안전자산으로서의 긴급한 매력(안전자산 프리미엄)을 앗아가 버렸다 . 결국 금 시장은 인플레이션 우려(금리 인상)와 잠잠해지는 안전자산 수요 사이에 끼어 어떤 방향으로도 추세를 잡지 못하고 흔들리게 된 것이다.
2026년 중반 금값 급락은 월가의 전망을 극단적으로 갈라놓았다. 이 엇갈린 시각은 이번 하락이 단순한 조정인지, 장기 강세장의 종말인지를 둘러싼 깊은 논쟁을 보여준다.
골드만삭스와 JP모건이 이끄는 '강세 진영'
골드만삭스는 이번 매도세에도 불구하고 2026년 말 금값 전망치를 5,400달러로 유지하며 강세 입장을 굳혔다. 그 근거는 각국 중앙은행의 지속적인 금 매입과 연준의 연내 두 차례 금리 인하 가능성, 그리고 민간 부문의 '매크로 헤지(거시 경제 위험 회피)' 수요이다 .
골드만삭스의 애널리스트 리나 토마스와 단 스트루이벤은 금이 '변혁적 구조적 국면'에 접어들었다고 분석한다. 중앙은행과 민간 투자자들이 거시 정책 리스크를 헤지하기 위해 금을 장기간, 전략적으로 사들이는 흐름 속에서 이번 하락은 과도했던 투기적 포지션이 정상화되는 과정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 이들은 2026년 한 해 동안 월평균 60톤, 연간 약 720톤의 중앙은행 금 매입이 이어질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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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망이 가장 낙관적인 곳은 JP모건이다. JP모건 글로벌 리서치는 2026년 4분기 금값이 평균 6,000달러에 도달하고, 2027년 말에는 6,300달러까지 오를 수 있다는 '초강세' 전망을 제시하기도 했다. 다만 이들 역시 이 목표가 지정학적 갈등과 연준 정책의 향방에 달려 있으며, 이 두 가지 모두 불확실성이 매우 크다고 덧붙였다 .
시티그룹이 이끄는 '약세 진영'
반면 시티그룹은 단기 전망에 가장 비관적인 목소리를 내고 있다. 시티는 앞서 살펴본 대로 3개월 목표가를 4,000달러로 하향 조정했으며, 더 심각한 약세 시나리오도 함께 제시했다. 만약 호르무즈 해협 봉쇄가 여름 내내 지속될 경우, 금값이 불과 9개월 전 수준인 3,500달러까지 추락할 수 있다고 경고한 것이다 .
이렇듯 불과 한 달여 만에 시티의 4,000달러에서 JP모건의 6,000달러까지, 월가의 금값 전망은 무려 2,000달러에 달하는 스프레드(격차)를 보이며 사상 유례없는 혼란을 반영하고 있다 .
금값이 하염없이 추락한다는 전망에 강력하게 반대할 수 있는 근거는 바로 '중앙은행'의 존재다. ECB가 최근 발간한 '유로의 국제적 역할' 보고서에 따르면, 2025년 한 해 동안 전 세계 중앙은행의 금 매입량은 약 850톤에 달했다 . 이는 매년 1,000톤 이상을 사들였던 2022~2024년에 비해 감소한 수치지만, 사상 최고 수준의 금값을 기록 중이라는 점을 고려하면 여전히 엄청난 규모다.
보고서는 "지속되는 지정학적 긴장이 역사적으로 높은 금 가격에도 불구하고 중앙은행의 강력한 금 수요를 촉발했다"라고 명시하고 있다 . 이렇게 중앙은행이 금을 사들이는 '구조적(structural) 수요'는 과거 어떤 약세장에서도 존재하지 않았던 강력한 가격 하단 지지 요인이다. 골드만삭스를 비롯한 강세론자들은 바로 이 대목에서 "이번 하락은 장기 강세장 안에서의 조정일 뿐"이라고 확신하는 것이다.
6월 중순 현재 금 시장은 중대한 기로에 서 있다. 단순한 조정으로 끝날지, 장기 하락 추세로 접어들지는 앞으로 발표될 주요 경제 지표와 사건에 따라 결정될 가능성이 크다.
1. 미국의 6월 소비자물가지수(CPI) 발표
가장 먼저 시장에 충격을 줄 수 있는 것은 소비자물가지수(CPI)다. 시장의 예상을 뛰어넘는 '뜨거운(Hot)' 인플레이션 수치가 발표된다면, 중앙은행들의 긴축 정당성이 더욱 강화되며 금값에 결정타를 날릴 수 있다 . 반대로 인플레이션이 예상보다 빠르게 둔화되는 모습을 보인다면 금리 인상 공포가 누그러지며 금값에 반등의 빌미를 제공할 것이다.
2. 연준의 통화정책 회의 (6월 16~17일)
가장 중요한 변수는 역시 연방공개시장위원회(FOMC)를 포함한 연준의 결정이다. 만약 연준이 연내 금리 인하 가능성을 배제하거나, 오히려 금리 인상 카드를 만지작거리는 매파적(통화 긴축 선호) 신호를 보낸다면 금값 폭락은 한층 더 가팔라질 수밖에 없다. JP모건과 골드만삭스의 강세 전망은 기본적으로 연준이 연내 50bp(0.50%p)가량 금리를 내릴 것이라는 가정에 기초하고 있기 때문에, 이 기대가 꺾이는 순간 낙관론은 큰 타격을 받게 된다 .
3. 이란 리스크의 향배 (미국-이란 협상)
이란과의 갈등이 어떻게 봉합되느냐도 '양날의 칼'이다. 평화 협상이 극적으로 타결되어 원유 공급 불안이 해소되면 에너지 인플레이션 압력이 줄어들면서 금리 추가 인상 부담이 완화될 수 있다. 하지만 동시에 금값을 간헐적으로 떠받쳐 온 안전자산 매력마저 사라져 버리는 부작용이 있다. 반대로 협상이 결렬되어 중동 긴장이 다시 최고조에 달하면 유가가 재차 폭등하며 '인플레이션 → 금리 인상'이라는 금에는 최악의 피드백 고리가 더욱 견고해질 것이다 .
결론: 낙관도 비관도 못 하는 '혼돈의 시장'
시티 스스로도 '신념이 낮은(low-conviction) 전망'이라고 밝혔듯, 현재 금 시장은 어느 누구도 미래를 장담할 수 없는 상황이다. 시티의 기본 시나리오(확률 50%)는 '연중 점진적 하락'이지만, 동시에 30%의 확률로 2026년 말 5,000달러, 2027년 말 6,000달러에 도달할 것이라는 강세 시나리오도 함께 제시하고 있다 .
이것이야말로 2026년 금 시장의 딜레마를 가장 정확히 보여주는 대목이다.
다가올 CPI 지표와 연준의 선택, 그리고 이란발 지정학적 리스크의 향방이 엇갈리는 두 미래 중 어느 쪽으로 시장의 추가가 기울게 될지를 최종 결정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