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나 파시냔 총리는 6월 1일 영상 연설을 통해 "선택이 불가피한 지점에 도달할 때까지 국민투표를 실시하는 것은 논리적이지 않다"며 이 요구를 단호히 거부했다. 그는 아르메니아가 공식적으로 EU 회원국 가입을 신청하거나 후보국 지위가 가시화되기 전까지는 EAEU 체제 안에서 계속 활동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러시아는 아르메니아의 서방 편입이 감당하기 어려운 경제적 대가를 수반할 것임을 분명히 하고 있다. 드미트리 페스코프 크렘린궁 대변인은 아르메니아가 EU에 가까워질수록 "EAEU 내에서 불가피하게 문제에 직면할 것"이라며, "EAEU 회원국들의 재정을 희생시키면서까지 그래서는 안 된다"고 직격탄을 날렸다.
아르메니아 공식 통계는 그 파장이 얼마나 심각한지를 보여준다. 아르메니아 대외 무역의 약 40%가 EAEU와 연동되어 있으며, 2025년 한 해에만 EAEU 회원국으로 32억 달러어치를 수출했고, 이 중 29억 달러가 러시아로 향했다. EAEU를 떠나면 5%의 통일된 낮은 관세율과 다양한 상품에 대한 무관세 수입 권리를 한순간에 잃게 된다.
러시아 고위 관료들의 경고는 더욱 직설적이다. 알렉세이 오베르추크 부총리는 아르메니아가 EAEU를 탈퇴할 경우 수출이 7080% 급감하고 에너지 및 식품 가격이 폭등할 것이라고 내다봤다40%의 GDP 감소를 예측하며 "EU의 넉넉한 보조금을 기대해선 안 된다"고 못 박았다. 푸틴 대통령 본인도 탈퇴 시 최소 GDP의 14%가 증발할 것이라고 경고했으며
, 세르게이 쇼이구 안전보장회의 서기는 이보다 훨씬 높은 30
.
러시아는 5월 30일 세르게이 코피르킨 주아르메니아 대사를 "협의"를 위해 모스크바로 소환했다. 대사 소환은 외교 관례상 심각한 불만을 나타내는 고전적이면서도 강력한 시그널이다. 러시아 외무부의 성명은 이례적으로 직설적이었다. 그들은 "아르메니아 지도부가 유럽연합과의 관계 강화를 위해 취한 조치가 유라시아경제연합 내 협력을 훼손하고 있다"고 소환 사유를 밝혔다.
앙숙이 된 두 정상 간의 전화 통화는 위기가 고조되는 가운데 서로의 입장을 재확인하는 창구가 되었다. 이러한 패턴은 2025년 1월 17일, 파시냔 총리가 EU 가입을 향한 아르메니아의 입법 조치를 설명하기 위해 푸틴 대통령에게 직접 전화를 걸면서 본격화되었다. 당시 모스크바는 "엄중한 경고"를 보낸 것으로 알려졌다.
그해 10월 7일에는 파시냔이 푸틴의 생일을 축하했고, 이듬해 6월 1일에는 푸틴이 파시냔의 50세 생일을 축하하는 전화를 걸었다
. 표면적으로는 의례적인 소통이지만, 이는 양 정상이 합의점 없이 팽팽히 맞서는 양극화된 관계를 그대로 드러내는 자리였다. 푸틴 대통령은 최근에도 생일 축하 메시지에서 "우호적인 아르메니아-러시아 관계"를 강조했지만, 실제 현실은 정반대로 흘러가고 있다
.
이번 위기에서 가장 폭발적인 국면은 5월 29일 로이터 통신의 심층 보도를 통해 드러났다. 5명의 서방 정보 당국자와 정부 문서를 근거로 한 이 보도는, 러시아가 파시냔 총리의 재선을 막기 위해 대대적인 비밀 공작을 강화해 왔다고 전했다.
서방 정보 당국이 확인한 작전은 현대판 하이브리드 전쟁의 전형을 보여준다.
조직적 허위 정보 유포. 연구자들은 최근 몇 년간 가장 광범위한 친크렘린 허위 정보 작전 중 하나를 추적하고 있다. '마트료시카(Matryoshka)'로 명명된 이 네트워크는 인공지능(AI)을 적극 활용해 조작된 동영상을 제작한다. 5월 초까지 무려 343개의 가짜 동영상이 살포되었으며, 이는 2025년 몰도바 선거 당시 관찰된 규모에 버금가는 수준이다. 인권 연구소(Institute for the Study of Human Rights)의 정책 보고서는 이러한 작전이 "선거 공학, 불법 정치 자금, 제도권 포섭을 아우르는 복합적이고 다층적인 노력"으로 진화했으며, 궁극적으로 아르메니아의 정치적 궤도를 바꾸려는 의도를 지녔다고 분석했다
.
유권자 수입 계획. 이 계획 중 가장 파격적인 부분은 무려 5천만 달러(약 700억 원 상당)를 투입해 러시아에 거주하는 러시아-아르메니아 이중 국적자 수만 명을 아르메니아로 이송, 투표에 참여시켜 선거 결과를 뒤집으려는 시도였다. 일부 소식통은 그 규모가 최대 10만 명에 달할 수 있다고 전했다
.
아르메니아 해외 정보국도 이미 몇 달 전, 배후의 외부 행위자들이 투표 결과에 "영향을 미치기 위한" 음모론과 대규모 허위 정보를 유포하는 등 악의적인 정보 작전이 진행 중이라고 경고한 바 있다.
소식통들은 EU가 "강압 규탄"이라는 특정 표현을 사용한 독립적 성명을 발표하지는 않았지만, 여러 EU 회원국과 기구들이 아르메니아의 유럽 통합의 주권적 권리를 지속적으로 지지했다고 전한다. 이는 외교 채널을 통해 반복적으로 재확인된 EU의 공식 입장이다. 또한 EU는 러시아가 "아르메니아 경제를 해치고 총선 결과에 영향을 미치려 한다"고 비판했다
.
파시냔 총리는 이번 총선에서의 승리가 곧 아르메니아의 새로운 지정학적 노선을 확고히 하는 역사적 전기가 될 것이라는 판단 아래 위험천만한 승부수를 던졌다. 현재까지의 조짐은 그의 승리를 점치고 있다. 5월 31일 유로뉴스가 공개한 여론조사에 따르면, 파시냔 총리는 압도적 승리와 함께 명확한 친서방적 위임을 확보할 가능성이 높다. 해당 보도는 푸틴 대통령이 아르메니아의 현 상황을 우크라이나 사태와 유사한 궤적이라고 경고한 지 며칠 지나지 않아 나온 것이다. 앞서 도널드 트럼프 전 미국 대통령은 파시냔에 대해 "완전하고 전폭적인 지지(complete and total endorsement)"를 보낸 바 있다.
이 모든 정황을 종합하면, 수십 년간 이어져 온 아르메니아-러시아 동맹은 급속도로 와해되고 있다. 파시냔 총리는 자신의 정치적 운명을 모두 서방으로의 외교적 전환에 걸었으며, 6월 7일 총선은 크렘린이 강요하는 공식 국민투표가 아닌, 아르메니아 국민의 선택을 묻는 새로운 형태의 사실상의 찬반 투표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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