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만 안정적인 임금 지표는 지금까지의 상황을 보여줄 뿐, 에너지 공급 차질이 장기화될 경우에도 같은 흐름이 이어진다는 뜻은 아니다. 미국과 이란 사이의 외교적 돌파구에 대한 기대가 약해지면서 시장은 호르무즈 해협을 통한 선박 운항 제한이 더 오래 지속될 가능성을 가격에 반영하기 시작했다. 그 결과 에너지 가격에는 지정학적 위험 프리미엄이 남아 있고 공급 우려도 커졌다.
ECB는 이란 전쟁과 연계된 에너지 충격이 유로존 물가를 끌어올리는 동시에 경제성장을 약화시킬 수 있다고 설명했다. ECB 실무진의 전망 역시 호르무즈 해협이 점진적으로만 재개될 경우 유가가 지속적으로 높은 수준에 머물고, 유로존 성장률은 낮아지며 물가는 더 높아질 수 있다고 봤다.
이 때문에 통화정책은 난처한 선택에 놓인다. 에너지 가격 상승은 물가를 밀어 올리지만, 구매력 감소와 생산비 상승, 공급 차질은 수요와 성장을 약화시킬 수 있다. ECB가 주목할 지점은 에너지 가격 충격이 해당 품목에만 머무는지, 아니면 임금·서비스 물가·중장기 인플레이션 기대까지 번지는지다.
렌의 발언은 ECB가 미리 정해진 정책 경로를 따르기보다 추가 데이터를 확인할 가능성을 높인다. 정책위원들이 비교할 핵심 신호는 다음과 같다.
ECB의 2026년 2분기 전문가 전망조사에서는 단기 헤드라인 및 근원 인플레이션 전망이 상향 조정된 반면, 장기 헤드라인 인플레이션 전망은 변하지 않았다. 이는 단기적인 물가 충격과 중장기 물가 안정에 대한 신뢰 상실을 구분해서 봐야 한다는 점을 보여준다.
따라서 9월 결정의 핵심은 에너지 가격이 얼마나 올랐는지 자체보다 그 충격이 얼마나 오래가고 어디까지 확산되는지에 있다. ECB는 임금협상 결과, 서비스 물가, 인플레이션 기대, 기업의 비용 전가 범위를 집중적으로 살필 가능성이 크다.
환율 영향도 한 방향으로만 정리하기 어렵다. 시장이 에너지발 인플레이션의 지속으로 ECB가 금리를 더 오래 높은 수준에 유지할 것이라고 판단하면 유로존의 예상 금리가 올라가 유로를 지지할 수 있다.
반면 호르무즈 해협의 차질이 장기화되면 유럽의 에너지 비용과 성장 둔화 우려도 함께 커진다. 투자자들이 ECB의 긴축 가능성보다 유럽 경기 약화와 지정학적 위험을 더 크게 본다면 미국 달러 수요가 늘면서 EUR/USD에 하방 압력이 가해질 수 있다. 시장 분석에서도 에너지 가격 상승이 ECB의 추가 금리 인상 기대를 높이더라도 성장 충격이 유로에 더 중요한 변수가 될 수 있다는 점이 지적됐다.
결국 시장이 이번 충격을 ‘ECB가 대응해야 할 인플레이션 문제’로 해석할지, 아니면 ‘유럽의 교역조건과 성장에 더 큰 타격을 주는 문제’로 해석할지가 관건이다. 렌의 발언은 두 가능성을 모두 열어두고 있다. 분명한 조건은 하나다. 완만한 임금 상승세가 안도감을 주려면 인플레이션 기대가 계속 안정적으로 유지돼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