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매도세가 모든 주식을 무차별적으로 덮친 것은 아니었습니다. 매물 폭탄은 1년 넘게 증시 랠리를 이끌어 왔던 기술주와 반도체 종목에 집중됐습니다. ‘AI가 세상을 바꿀 것이다’라는 서사에 가려져 있던 의구심이 결국 폭발한 것입니다. 시장 참가자들은 AI 관련 주식의 기업 가치(밸류에이션)가 실제 실적과 괴리되어 너무 앞서 나갔다고 판단하기 시작했고, 이는 해당 섹터에서 자금을 급격히 빼내는 움직임으로 이어졌습니다 .
특히 문제는 ‘쏠림’이었습니다. 많은 투자자가 너도나도 AI 관련주에 몰려들면서 좁은 출구에 사람이 한꺼번에 몰린 것과 같은 상황이 만들어졌습니다. 투자 심리가 조금만 흔들려도 모두가 한꺼번에 빠져나가려 하며 주가가 곤두박질치는 구조였습니다. 증시 대장주인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의 비중이 절대적인 한국 코스피 지수가 아시아에서 가장 취약한 지수로 꼽힌 것도 이 때문입니다 . 사실 이번 AI 거품 붕괴의 전조는 이미 며칠 전부터 나타나고 있었습니다. 미국 반도체 기업 브로드컴(Broadcom)이 시장 기대에 못 미치는 실망스러운 사업 전망을 내놓으면서, AI가 이끄는 성장이 지속 가능할지에 대한 의심의 씨앗이 심어졌던 것이죠
.
거시 경제와 기술주에 대한 우려만으로도 시장은 충분히 휘청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란과 이스라엘 간의 새로운 무력 충돌 소식이 전해지며 지정학적 위기라는 또 다른 기름을 불타는 시장에 부었습니다 . 이날 소식으로 국제 원유 벤치마크인 브렌트유는 배럴당 95달러를 돌파했습니다. 에너지 비용 상승은 이미 진행 중인 인플레이션 공포를 부채질했고, 투자자들은 더욱 빠르게 위험 자산을 팔고 달러나 금 같은 안전자산으로 몸을 피하는 ‘리스크 오프’ 심리를 강화했습니다
. 보도에 따르면, 미국을 비롯한 국제 사회의 외교적 중재 노력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이 이란 서부와 중부의 군사 목표물들을 타격하면서 충돌이 현실화된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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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SMC (대만): 전 세계 AI 반도체 공급망의 심장이나 다름없는 TSMC는 이날 하루 동안 믿기 힘든 역사적 기록을 써 내려갔습니다. TSMC 주가는 장중 한때 2,230 대만달러까지 밀리며 사상 최대 규모인 약 3조 5천억 대만달러의 시가총액이 증발했습니다. 이날 미친 듯한 하락은 TSMC라는 기업 자체의 문제가 아닌, AI 섹터에 대한 우려, 고금리 공포, 그리고 지정학적 불확실성이라는 외부 요인에 의해 촉발됐습니다 .
가권 지수 (대만): 대만 증시의 대표 지수인 가권(Taiex)도 이날 하루에만 2,600 포인트 이상 급락했습니다. 반도체에서 시작된 충격은 여타 기술주 전반으로 빠르게 확산되었습니다 . 불과 며칠 전인 6월 초, 46,500을 넘어서며 사상 최고치 경신을 목전에 뒀던 지수는 이날 한순간에 43,503까지 밀려났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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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스피 (한국): 한국의 코스피 지수는 이날 아시아 대폭락의 진원지나 다름없었습니다. 장중 한때 무려 8.8%까지 폭락하는 충격적인 모습을 보였습니다. 낙폭이 너무 가파르자 한국거래소는 프로그램 매매 효력을 일시 정지하는 ‘서킷브레이커’를 발동했고, 이로 인해 20분 동안 모든 종목의 거래가 강제로 중단되는 초유의 사태가 벌어졌습니다 . 고점 대비 낙폭은 순식간에 17%에 육박했습니다. 불과 며칠 전 기록한 사상 최고치의 17%가 하루아침에 사라진 것입니다
. 결국 코스피는 8.3% 폭락한 채로 이날 거래를 마감했습니다
.
닛케이 225 (일본): 일본 닛케이 지수는 3.9% 하락했습니다. 한국과 대만의 충격적인 낙폭에 비하면 상대적으로 선방한 수치지만, 이 역시 결코 가볍게 볼 수 있는 하락률이 아닙니다. 일본 시장 역시 반도체와 AI 관련 주식 비중이 높아, 글로벌 기술주 매도 폭풍에서 자유롭지 못했음을 보여줍니다 .
미국 선물 시장: 아시아 시장이 말 그대로 ‘불구덩이’에 빠져 허우적대는 동안, 시간외 거래에서 미국 주가지수 선물은 의외로 소폭 반등하는 양상을 보였습니다 . 이는 일부 트레이더들이 이번 아시아 시장의 매도세를 시스템적 위기의 시작보다는 저가 매수의 기회로 보기 시작했음을 시사하는 대목입니다. 시장의 가장 큰 궁금증은 결국 이 폭락이 과도한 쏠림을 해소하는 자연스러운 ‘조정’이 될 것인가, 아니면 더 큰 위기의 시작점인 ‘전염’이 될 것인가였습니다.
이 질문에 대한 증거는 혼재되어 있으며, 아직 답을 내리기엔 섣부릅니다. 분명한 것은 코스피 고점 대비 17%, TSMC 시가총액의 3조 5천억 대만달러 증발 등 이날의 수치는 지나치게 쏠렸던 시장 참여자들이 공포에 질려 한꺼번에 청산에 나설 때나 볼 수 있는 패턴이라는 점입니다. 과열되고 안일해진 시장의 민낯이 적나라하게 드러난 순간이기도 했습니다 .
하지만 낙관적인 반론도 만만치 않습니다. 앞서 언급한 미국 선물 반등이 그렇고, 이날 폭락의 직접적인 원인이 된 미국 고용 지표가 사실 알고 보면 경제의 놀라운 회복력을 보여주는 긍정적 신호라는 점도 그렇습니다. 역사적으로 볼 때, 견조한 노동 시장은 단기적으로 긴축이라는 독약을 투여하지만, 중장기적으로는 기업 실적과 주식 시장을 떠받치는 강력한 버팀목입니다.
대다수 애널리스트들은 이번 사태를 주가가 바닥 없이 추락하는 약세장의 시작이라기보다는, AI를 향한 과도한 기대치에 대한 일종의 ‘현실 인식’ 과정으로 진단했습니다. 그러나 매파(통화 긴축 선호)로 급변한 미 연준, 역사적 고점에 자리 잡은 기술주 밸류에이션, 그리고 언제든 더 악화할 수 있는 예측 불가능한 중동 리스크까지 삼박자가 겹친 지금은 ‘초고변동성’ 구간입니다. 6월 8일의 사태는 ‘좋은 경제 뉴스가 어떻게 시장에 악재가 될 수 있는지’, 그리고 ‘오랫동안 잠들어 있던 지정학적 리스크가 어느 날 갑자기 즉각적인 대가를 요구할 수 있는지’를 생생히 보여준 사건으로 기록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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