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락 폭만큼이나 중요한 것은 타이밍이었다. 직전 거래일 코스피는 이미 사상 최고치를 기록했고, 상승의 중심에는 AI 수혜 기대를 받은 반도체 대형주가 있었다 . 5월 11일에는 삼성전자가 5% 넘게, SK하이닉스가 10% 넘게 오르며 두 종목 모두 사상 최고 수준에 도달했다는 보도도 나왔다
.
이런 장에서는 작은 매도도 크게 흔들릴 수 있다. 특히 지수가 소수 대형주에 의존해 빠르게 오른 뒤라면, 차익실현은 단순한 매물이 아니라 시장 전체의 방향을 바꾸는 신호가 된다.
가장 뚜렷한 시장 요인은 외국인 매도였다. 코스피가 8,000선 근처까지 오른 뒤 외국인 투자자들이 최근 랠리의 차익을 실현하기 위해 대규모 매도에 나서면서 지수가 하락 전환했다는 보도가 잇따랐다 .
이날 하루의 변심만은 아니었다. 코스피가 7,000선을 넘어선 직후인 5월 7~8일에도 외국인은 이틀 동안 12조 원 넘게 순매도한 것으로 보도됐다. 5월 7일에는 6조7000억 원, 8일에는 5조3000억 원 규모의 순매도가 나왔다 .
다만 이를 외국인이 한국 AI 스토리 전체를 포기한 것으로 보기는 어렵다. 5월 4~7일 사이 외국인은 삼성전자를 약 1조5000억 원 순매수하는 한편, SK하이닉스와 SK스퀘어는 약 1조4500억 원어치 순매도한 것으로 전해졌다 . 즉 외국인 자금은 한국 반도체를 통째로 떠났다기보다, 급등한 종목 사이에서 이익을 확정하고 포지션을 바꾸는 모습에 가까웠다.
문제는 그런 로테이션이 이미 과열된 지수와 만났다는 점이다. 8,000선이라는 상징적 가격대 앞에서 매도 압력이 커지자, 시장은 빠르게 방어력을 잃었다.
급락을 더 민감하게 만든 변수는 정책 불확실성이었다. 외신 분석을 인용한 보도들은 이날 코스피 변동성이 김용범 정책실장의 이른바 ‘AI 국민배당’ 구상 논란과 맞물렸다고 전했다. 특히 김 실장이 SNS에 올린 글 이후, AI 붐으로 쌓인 기업 이익을 사회적으로 재분배해야 한다는 논의가 커지면서 투자자들이 향후 정책 방향을 가늠하기 어려워졌다는 설명이 나왔다 .
이 구상은 정치적으로는 강한 메시지를 갖는다. AI와 반도체 산업에서 창출된 막대한 부와 세수를 국민에게 배당 형태로 돌려줘야 한다는 주장으로 소개됐기 때문이다 . 그러나 주식시장 관점에서는 질문이 달라진다. “누가 얼마나 혜택을 받느냐”보다 “상장기업의 미래 이익 중 일부가 세금, 부담금, 이익공유 방식으로 줄어들 수 있느냐”가 먼저 가격에 반영된다.
한 보도는 김 실장이 이후 이 구상이 기업에 직접 법인세를 부과하는 방식이 아니라 ‘초과 세수’를 활용하는 방안이라고 해명했다고 전했다 . 이 차이는 중요하다. 초과 세수를 배분하는 것과 특정 기업의 이익을 직접 환수하는 것은 시장에 미치는 영향이 다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미 AI 반도체 호황을 전제로 주가가 급등한 상황에서는, 초기의 모호함 자체가 매도 명분이 되기에 충분했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는 단순히 대형주라서 흔들린 것이 아니다. 최근 코스피 상승의 핵심 동력이 바로 두 종목이었다. AI 서버와 고성능 메모리 수요 기대가 커지면서 국내 대표 반도체주가 랠리를 주도했고, 전날에도 두 회사의 주가 강세가 코스피 사상 최고치 흐름을 이끌었다 .
지수 구조상으로도 두 회사의 비중은 압도적이다. 올해 초 KED Global은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의 가치가 유가증권시장 전체의 약 40%에 이르렀다고 분석했다 . 이런 상황에서는 두 종목에 대한 정책 리스크나 밸류에이션 부담이 곧바로 코스피 전체의 문제로 번진다.
시장 내부의 쏠림도 이미 신호를 보내고 있었다. 5월 4일 코스피가 5% 넘게 급등했을 때도 상승 종목보다 하락 종목이 더 많았고,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의 영향력이 두드러졌다는 보도가 있었다 . 지수는 오르지만 체감 종목은 따라오지 못하는 장세였다는 뜻이다. 이런 장에서는 주도주가 흔들리는 순간 지수 전체의 하락 속도가 빨라진다.
이번 논란이 하루짜리 주가 조정으로만 끝나지 않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한국의 AI 반도체 붐은 주주에게는 평가이익을, 기업에는 이익 증가 기대를, 정부에는 수출과 세수 확대 기대를 만들었다. 김용범 정책실장의 ‘AI 국민배당’ 구상은 이 흐름에 다른 질문을 던졌다. AI와 반도체가 만든 부를 주주와 기업만이 아니라 국민에게 더 직접적으로 나눌 수 있느냐는 질문이다 .
정책 논쟁 자체가 잘못됐다는 의미는 아니다. 다만 시장은 불확실성을 싫어한다. 정부가 AI 수익을 ‘국가적 자원’처럼 바라보기 시작했다고 투자자들이 해석하면, AI 수혜주에는 더 높은 정책 리스크 할인이 붙을 수 있다. 반대로 실제 방안이 기업의 추가 부담이 아니라 초과 세수 배분에 그친다면, 반도체 기업의 이익 전망에 미치는 직접 충격은 훨씬 작아질 수 있다 .
코스피 급락은 하나의 원인으로 설명하기 어렵다. AI 반도체주가 이끈 빠른 상승, 8,000선을 앞둔 외국인 차익실현, 삼성전자·SK하이닉스에 집중된 지수 구조, 그리고 ‘AI 국민배당’이 불러온 정책 불확실성이 한꺼번에 겹쳤다 .
김용범 정책실장의 구상이 급락을 단독으로 만든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 발언과 논쟁은 매도세의 성격을 바꿨다. 평소라면 “고점 부담에 따른 차익실현”으로 끝났을 장면이, 이번에는 “AI 반도체 호황의 이익을 시장이 전부 가져갈 수 있는가”라는 더 큰 질문으로 번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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