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계상 백미는 **공유 익명성 집합(shared anonymity set)**에 있다. 보호 풀이 프로토콜 전체에서 단 하나로 통합 운영되기 때문에, 어떤 지갑이든 이 표준을 통합하기만 하면 다른 모든 사용자의 익명성까지 자동으로 강화된다 . 과거 파편화된 프라이버시 풀들이 약한 익명성에 그쳤던 것과 완전히 대비되는 지점이다.
EIP-8182가 거래 계층을 겨냥한 것이라면, 공식 트래킹 번호 ERC-7605로 등록된 pERC-20은 토큰 자체의 정의를 뒤흔든다. 발상은 단순하지만 파격적이다. pERC-20 세계에는 공개된 balanceOf나 transferFrom 함수가 존재하지 않는다 .
대신 모든 잔액은 암호화된 **크립토그래픽 노트(cryptographic notes)**로 존재하며, 전송의 발신자, 수신자, 금액은 기본적으로 숨겨진다. 이는 토큰이 발행되는 순간부터 공개 장부에 잔액이 기록되지 않도록 설계된 것으로, 지캐시(Zcash)의 오차드(Orchard) 프로토콜과 ZK-UTXO 모델에 뿌리를 두고 있다 . 전체 공급량(totalSupply)만이 공개 검증 가능한 감사 기준점으로 제공될 뿐, 개별 보유량과 이동 경로는 철저히 비공개 처리된다
.
또 하나 중요한 점은, 초기 프라이버시 설계에서 간과됐던 규제 컴플라이언스를 내장했다는 사실이다. 이 제안에는 토큰 발행자가 특정 주소를 비공개 풀에서 배제할 수 있도록 하는 블랙리스트 기능이 포함돼 있다 . 이는 기관 투자자들의 주류 채택을 위해 규제적 개입의 여지를 남기되, 전체 프라이버시 집합 자체는 무너뜨리지 않는 실용적 노선을 택한 것이다.
EIP-8182와 pERC-20이 협의 중인 제안이라면, 스타크넷의 STRK20 프레임워크는 현재진행형이다. 2026년 3월 처음 발표되었고, 6월 9일 메인넷에 완전히 출시돼 스타크넷 위의 모든 ERC-20 자산을 보호(shield)하고 비공개로 전송하며 DeFi에서 활용할 수 있게 됐다 .
첫 번째 적용 자산은 비트코인 담당 랩드 토큰인 strkBTC로, 공개 모드와 보호 모드를 자유롭게 오갈 수 있다 . 사용자는 Ready X나 Xverse 같은 호환 지갑에서 간단히 모드를 전환할 수 있다
. 보호 모드로 전환하는 순간, 잔액과 거래 내역은 외부 관찰자에게 완전히 보이지 않게 되지만, 에쿠보(Ekubo)나 AVNU 같은 익명 스왑·대출 프로토콜에서의 구성 가능성(composability)은 그대로 유지된다
.
STRK20의 컴플라이언스 핵심은 **열람 키(Viewing Key)**에 있다. 토큰 보유자는 규제 기관, 감사인, 세무 당국 등 특정 제3자에게 열람 키를 부여해 거래 내역을 복호화할 수 있도록 허용할 수 있으며, 이 키가 없는 세상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 이 선택적 공개(selective disclosure) 모델은 토네이도 캐시(Tornado Cash)가 완전한 익명성으로 인해 어떤 규제 협력도 불가능했던 근본적 딜레마를 정면으로 해결한다
.
서로 다른 계층에서 작동함에도 세 이니셔티브는 놀랍도록 일관된 철학을 공유한다.
첫째, 프라이버시는 더 이상 기능이 아니라 인프라로 취급된다. EIP-8182는 합의 계층에, pERC-20은 토큰 인터페이스에, STRK20은 L2 토큰 컨트랙트에 프라이버시를 심는다. 모두 기존 투명 시스템을 래핑(wrapping)하는 방식이 아니라, 프라이버시 자체를 기본 상태(default state)로 삼는 것이다.
둘째, 컴플라이언스가 설계의 첫 번째 원칙으로 자리 잡았다. pERC-20의 블랙리스트, STRK20의 열람 키, EIP-8182의 이중 지불 방지용 무효화 집합(nullifier set)은 모두 무법적 익명성 대신 현실 세계의 제도적 책무를 존중하는 기밀성을 지향한다.
이러한 수렴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이더리움 개발자 커뮤니티가 '금융 프라이버시는 네트워크의 장기적 안정성을 위해 필수적이되, 통제된 정보 공개 경로와 함께 설계돼야 한다'는 새로운 합의에 도달했음을 보여준다.
물론 대부분의 작업은 아직 초기 단계다. EIP-8182는 제안 상태이며 헤고타 하드포크 포함이 확정된 것은 아니다. pERC-20 역시 초안 검토 단계에 머물러 있다. STRK20은 가장 앞서 있지만, 지갑과 앱, 사용자들이 이 모델을 얼마나 수용하느냐에 따라 장기적 성공 여부가 결정될 것이다.
그러나 방향성만큼은 이제 분명해졌다. 완전히 투명한 공개 장부만이 유일한 올바른 기본값이었던 시대에 도전장이 내밀어졌고, 그 자리에 프라이버시가 프로그래밍 가능하고, 규제 대응이 내장된, 기밀성이라는 이더리움 생태계의 표준 기능이 태동하고 있다.
Comments
0 commen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