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K하이닉스는 현재 엔비디아가 필요로 하는 HBM4의 약 50~70%를 공급하고 있는 것으로 추산된다. 하지만 이번 합의의 핵심은 물량 납품이 아니다. 이제 두 회사는 공동 로드맵을 짜고, 엔비디아의 차세대 GPU 및 시스템 아키텍처에 최적화된 메모리를 함께 개발하기로 했다. AI 공장(AI Factory)을 전 세계적으로 구축하는 데 필요한 막대한 설비 투자와 긴 연구 개발 주기를 함께 풀어나가겠다는 의지다 .
협력 대상에 오른 플랫폼은 엔비디아의 풀스택 비전이 얼마나 깊숙이 메모리와 통합되고 있는지를 극명하게 보여준다.
서울에서의 황 CEO 발언은 1년 가까이 이어져 온 메모리 병목 현상 경고의 최신판에 불과하다. 며칠 전 컴퓨텍스 2026 타이베이 행사에서 최태원 회장은 **“메모리 공급 부족이 2030년까지 이어질 것”**이라고 못을 박았다. 이는 비단 SK만의 전망이 아니다 .
최 회장은 이 자리에서 가장 공격적인 투자 계획도 공개했다. 향후 5년 내 SK하이닉스의 전체 웨이퍼 생산 능력을 두 배로 늘리겠다고 천명한 것이다 . 그는 “새로운 메모리 공장을 짓는 데는 막대한 투자가 필요하고 최소 3년이 소요된다”며, 왜 2030년까지 공급이 묶여 있을 수밖에 없는지 설명했다
. 실제로 SK그룹은 2026년 3월 GTC 행사에서 전 세계 메모리 공급량이 2030년까지 수요보다 약 20% 부족할 것이라고 내다봤다
.
엔비디아-SK 협력 관계에서 기술적으로 가장 흥미로운 대목은 AI를 반도체 ‘제조 공정’이 아닌 ‘설계’ 단계에 접목한다는 점이다. SK하이닉스는 엔비디아의 쿠다-X(CUDA-X) 가속 라이브러리, 그중에서도 PhysicsNeMo 프레임워크를 도입하여 AI 기반 물리 시뮬레이션을 통해 TCAD(반도체 공정 시뮬레이션) 속도를 획기적으로 끌어올리고 있다 .
이는 2025년 10월 APEC에서 처음 발표된 광범위한 협력의 일환으로, 당시 SK그룹은 5만 개 이상의 엔비디아 GPU를 탑재한 국내 최대 규모의 AI 팩토리를 구축한다고 밝힌 바 있다. 오는 2027년 말 첫 가동이 목표인 이 거대 인프라는, AI로 반도체를 설계하는 시대의 전진 기지가 될 전망이다 .
이미 SK텔레콤은 SK하이닉스 반도체 공장에 옴니버스를 적용해 생산 라인과 물류, 장비를 시뮬레이션하는 개념 증명(PoC)을 성공적으로 마쳤다 . 2026년 3월 GTC 산호세 행사에서 엔비디아는 SK텔레콤을 핵심 피지컬 AI 파트너로 지명했으며, 양측은 반도체 팹은 물론 조선소와 방위 시설까지 영역을 넓혀 공동 기술 개발 위원회를 공식 출범시켰다
.
자율형 팹은 세 개의 축으로 구성된다. 두뇌 역할을 하는 ‘운영 AI’(Operation AI) , 몸체 역할을 하는 ‘피지컬 AI’(Physical AI) , 그리고 이 둘이 안전하게 진화할 수 있는 놀이터인 **‘디지털 트윈’**이 그것이다 . SK하이닉스는 2030년이라는 완전 자동화 시점에 맞춰 이 기술을 단계적으로 상용화할 예정이다
.
서울과 타이베이에서의 연쇄 회동은 더 큰 지역적 공급망 역학을 드러낸다. 컴퓨텍스 2026에서 최태원 회장이 TSMC 및 대만 공급망 기업들과의 긴밀한 협력을 시사하는 동시에, 엔비디아는 반도체 스택 전체의 물량을 확보하기 위해 대만 파트너사들에 대한 지출을 지속적으로 늘리고 있다 . 엔비디아-SK하이닉스-TSMC로 이어지는 반도체 삼각 동맹은 차세대 AI 인프라를 떠받치는 전략적 닻 역할을 할 것이다.
결론적으로, 이번 엔비디아-SK하이닉스의 다년 계약은 평범한 메모리 구매 계약이 아니다. 이는 향후 10년간 AI 공장 경제의 판도를 바꿀 공동 설계(Co-engineering) 하드웨어에 대한 구조적 베팅이다. 메모리 부족이 2030년까지 이어질 것으로 예측되고 새 웨이퍼 생산 능력을 갖추는 데 5년가량이 소요되는 현실 속에서, 이 파트너십은 두 회사를 실리콘 설계부터 공장 자동화, 그리고 피지컬 AI 경제에 이르기까지 서로 없어서는 안 될 운명 공동체로 묶어두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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