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유는 출발점일 뿐이다. 가정, 항공사, 화물차 운송업체, 제조업체가 실제로 쓰는 것은 경유·휘발유·항공유·나프타 같은 석유제품이다. 이들은 원유를 정유소에서 가공한 뒤, 정상적으로 작동하는 항로와 유통망을 거쳐야 비로소 시장에 도착한다.
따라서 원유 물량이 시장에 남아 있더라도 정제 능력과 운송, 제품 수출이 한꺼번에 막히면 연료와 석유화학 원료는 빠르게 타이트해질 수 있다. 원유는 다른 곳으로 돌리거나 재고로 남을 수 있지만, 그 원유로 만들어야 할 제품은 즉시 부족해지는 구조다.
병목은 ‘원유 생산’이 아니라 정제와 물류
정유소는 원유를 여러 제품으로 나눈다. 정유소가 멈추거나 가동률을 낮추거나 원유를 들여오지 못하면, 다른 지역에서 원유를 더 생산한다고 해서 사라진 경유·휘발유·항공유 물량이 곧바로 채워지는 것은 아니다.
중동 분쟁은 원유와 원료 수출 흐름을 흔들었고, 이에 따라 아시아의 정유사와 석유화학 기업들은 가동률을 낮추거나 설비를 멈추고, 일부는 불가항력(포스마주르)을 선언했다. 로이터에 따르면 시노펙은 공급 공백에 대응해 기존 계획보다 처리량을 10% 넘게 줄이는 방안을 추진했다.
2 아시아에 석유제품을 공급하던 걸프 지역 정유소들의 차질도 같은 부담을 키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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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도 또 하나의 큰 변수다. 러시아 정유시설에 대한 우크라이나의 드론 공격은 러시아 내 연료 부족을 낳았고, 한때 주요 연료 수출국이었던 러시아가 수입국으로 전환하는 상황으로 이어졌다고 로이터는 전했다.
1 정제설비 손실은 국내 소비와 수출에 쓸 경유·휘발유 등 완제품 공급을 직접 줄인다.
수출 통제가 설비 차질을 더 키운다
물리적 공급 차질은 주요 공급국이 자국 시장을 우선시할 때 훨씬 심해진다.
중국은 중동발 수입 차질 이후 국내 공급 보호를 위해 3월 경유·휘발유·항공유 수출을 금지했다. 이는 대체 물량을 찾던 아시아 시장에서 중요한 완충 공급원을 빼는 결과가 됐다.
3 이후 통제가 완화되면서 9월 중국의 정제연료 수출은 8월과 비슷한 수준으로 유지될 것으로 전망됐다.
1 다만 이는 압박을 일부 덜어줄 수 있다는 의미일 뿐, 손상된 정제 능력이나 흐트러진 교역 경로를 단번에 정상화한다는 뜻은 아니다.
원유보다 경유값과 정제마진이 더 오를 수 있는 이유
정유소 가동 중단은 완제품 공급을 줄이지만, 그 정유소로 들어갈 예정이던 원유 물량까지 반드시 사라지게 하지는 않는다. 이 차이 때문에 석유제품 가격과 원유 원가의 격차, 즉 **크랙 스프레드(정제마진)**가 커질 수 있다.
경유는 도로 화물운송, 건설, 농업, 광업, 비상발전에 폭넓게 쓰여 특히 중요하다. 골드만삭스는 러시아와 중동의 전쟁 관련 정유 차질로 세계 정제 활동이 위축되면서 경유가 이번 정제 압박의 “진원지”에 있다고 평가했다.
5 이후 보도에서는 이 은행이 공급 제약이 지속되는 가운데 경유 정제 이익 전망을 두 배 이상 높였다고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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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유와 항공유 가격 상승은 운송비와 기업 운영비로 번진다. 나프타 가격 상승은 플라스틱, 포장재, 용제, 도료 등 화학 공급망 전반의 비용을 밀어 올린다.
나프타 부족은 제조업 문제로 번진다
나프타는 정유제품이면서 석유화학의 핵심 원료다. 아시아의 스팀 크래커는 나프타 원료의 60% 이상을 중동에서 조달한다. 페르시아만 수송 흐름에 이상이 생길 때 아시아 화학업계가 취약할 수밖에 없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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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에서는 그 영향이 더 선명하게 나타났다. 로이터는 4월 나프타 또는 나프타 기반 제품에 의존하는 일본 기업들이 정부의 공급 충분성 설명에도 주문을 중단하거나 생산을 감축하고 있다고 보도했다.
4 일본 언론에서 쓰인 ‘나프타 파산’이라는 표현은 실제 도산 건수를 검증한 통계라기보다, 필수 원료 조달 불안과 기업 현장의 긴장감을 드러내는 표현으로 이해하는 편이 정확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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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충 장치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일본은 중동 이외 지역에서의 나프타 수입을 늘리고 국내 정제를 유지했으며, 이미 확보한 수입 물량과 재고로 6월 이후 수요도 충당할 수 있다고 밝혔다.
13 그러나 재고와 대체 조달은 시간을 벌어주는 수단일 뿐, 지역 차원의 생산·운송 체계가 망가진 문제를 즉시 고치지는 못한다.
러시아 원유도 추가 제약 요인이 될 수 있다
당장의 핵심 문제는 석유제품의 생산 능력과 배분이다. 다만 러시아 원유 공급 전망도 약화됐다.
국제에너지기구(IEA)는 정유시설·저장시설·운송 인프라를 겨냥한 공격이 이어지자 러시아의 2026년 석유 공급 전망을 낮췄다. 러시아 생산량은 약 3% 감소해 하루 890만 배럴 수준이 될 것으로 봤다.
19 리스타드에너지는 러시아 원유 생산량이 2026년 하루 평균 895만 배럴, 2027년 약 860만 배럴로 낮아질 것으로 전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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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이터가 입수한 러시아 정부의 초안 전망 역시 2026년 생산량 하향을 가리켰다. 다만 알렉산드르 노박 러시아 부총리는 정유소 정비가 끝나면 생산량이 다시 늘 것이라며 감소는 일시적이라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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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서로 다른 전망은 차질이 얼마나 오래갈지를 아직 단정하기 어렵다는 점을 보여준다.
공급 압박을 완화하려면
지속적인 완화는 원유가 충분하다는 조건만으로는 어렵다. 적어도 다음 조건들이 함께 개선돼야 한다.
- 정유소 복구 및 정상 가동률 회복
- 주요 해상 항로를 통한 원유·나프타·석유제품의 안정적 운송
- 주요 공급국의 제품 수출 정상화
- 복구까지의 공백을 버틸 충분한 재고
이런 조정은 유정 생산량을 늘리거나 줄이는 것보다 오래 걸린다. 특수 정제설비는 대체가 쉽지 않고, 바뀐 화물 흐름과 수출 제한은 지역 시장의 긴장을 장기간 유지할 수 있다. 결국 원유의 ‘가용성’만으로 경제가 실제로 소비하는 연료와 석유화학 원료의 가격·수급을 판단하기 어려운 이유가 여기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