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론부터 말하면
잔드보르트에서 메르세데스가 조지 러셀에게 키미 안토넬리를 보내주라고 한 것은 겉보기처럼 챔피언십 선두를 무조건 밀어주기 위한 결정만은 아니었다. 안토넬리는 더 신선한 타이어를 끼고 있었고, 러셀 뒤에는 역시 새 타이어를 장착한 페라리들이 따라붙고 있었다. 두 메르세데스가 서로 싸우는 사이 러셀이 페라리의 추월을 허용할 수 있다는 판단이 핵심이었다. 13
결과적으로 안토넬리는 2위, 러셀은 3위로 결승선을 통과했다. 메르세데스는 잔드보르트에서 2·3위 포디엄을 지켰다. 13
안토넬리와 러셀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나
레이스 후반 발생한 버추얼 세이프티카(VSC·가상 세이프티카)가 전략을 갈라놓았다. 안토넬리와 두 페라리 드라이버는 이 틈을 이용해 더 신선한 타이어로 교체했지만, 러셀은 트랙 포지션을 지키기 위해 피트인하지 않았다. 그 결과 러셀은 낡은 타이어로 2위까지 올라섰지만, 뒤에서 속도를 끌어올린 차들에 노출됐다. 38
안토넬리가 빠르게 간격을 좁히자 메르세데스는 러셀에게 “차량 순서를 뒤집겠다(invert)”고 통보했다. 즉, 두 드라이버가 트랙 위에서 싸우지 않고 러셀이 팀 동료를 먼저 보내라는 뜻이었다. 러셀은 2위를 내주면 뒤따르던 루이스 해밀턴에게 바로 추월 기회를 줄 수 있다며 무전으로 지시의 타당성을 되물었다. 313
메르세데스는 이를 일반적인 추월 상황으로 보지 않았다. 두 드라이버가 서로 다른 전략을 택했고, 한쪽에 타이어 성능상 뚜렷한 우위가 있을 때는 팀 동료끼리 싸우지 않는다는 기존 원칙에 따른 조치라는 설명이었다. 러셀도 경기 뒤에는 당시 상황에서 안토넬리가 자신보다 앞서 마칠 자격이 있었다고 인정했다. 131415
메르세데스가 결정을 옹호한 이유
메르세데스의 사후 분석은 ‘러셀에게 2위를 포기하게 했다’가 아니라 ‘러셀의 3위를 지켰다’는 데 초점이 맞춰졌다. 트랙사이드 엔지니어링 디렉터 앤드루 쇼블린은 VSC 동안 두 페라리가 새 타이어를 장착했지만, 러셀이 같은 선택을 하면 트랙 포지션을 잃을 수밖에 없었다고 설명했다. 따라서 새 타이어를 낀 안토넬리를 러셀 앞으로 보내 두 메르세데스가 서로 시간을 빼앗는 상황을 피하는 편이 유리했다. 5
메르세데스 부대표 브래들리 로드도 같은 결론을 내렸다. 그는 러셀이 처음 무전으로 지시를 확인한 것은 자연스러운 반응이었지만, 전체 전략을 이해한 뒤에는 결정의 취지를 받아들였다고 말했다. 또한 두 드라이버의 위치가 반대였더라도 메르세데스는 똑같은 판단을 내렸을 것이라고 밝혔다.
핵심은 메르세데스가 러셀에게 2위를 지킬 가능성이 전혀 없다고 본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다만 페라리가 더 신선한 타이어를 확보한 상황에서, 남은 랩을 팀 동료 간 싸움에 쓰는 것이 가장 위험한 선택이라고 판단했다.
러셀은 어떻게 3위를 지켰나
안토넬리를 먼저 보낸 뒤 러셀은 팀 동료와의 방어전을 벌이는 대신 타이어를 아끼며 뒤를 지키는 데 집중할 수 있었다. 앞선 피트스톱 기회를 활용했던 해밀턴은 남은 메르세데스 한 대를 향해 빠르게 접근했다. 18
하지만 서킷에 떨어진 잔해를 회수하기 위해 또 한 번 VSC가 투입되면서 해밀턴의 추격 흐름이 끊겼다. 러셀은 결국 3위를 사수했고, 페라리가 메르세데스 두 대 사이를 갈라놓는 상황도 막았다. 1
메르세데스 입장에서는 전략적으로 방어 가능한 결과였다. 안토넬리는 2위로 챔피언십 선두 격차를 더 벌렸고, 러셀은 팀이 순서 교체를 통해 지키려 했던 3위를 확보했다. 45
해밀턴과 르클레르 사이에서 불붙은 페라리 논란
잔드보르트의 또 다른 팀오더 논쟁은 페라리에서 나왔다. 루이스 해밀턴은 샤를 르클레르보다 약 네 랩 더 신선한 타이어를 끼고 르클레르를 따라잡았다. 해밀턴은 무전으로 “내가 샤를보다 빠르다. 내 타이어가 더 좋다”고 말했다. 2
페라리는 즉시 길을 열어주지 않았다. 르클레르에게 피트인을 지시했지만 그는 처음에는 따르지 않았고, 결국 다음 호출에서 피트레인으로 들어갔다. 그 사이 해밀턴은 메르세데스에 접근하는 데 필요한 시간을 잃었다며 불만을 드러냈다. 2
해밀턴은 결승에서 4위를 차지한 뒤 페라리의 지연 때문에 2위를 노릴 기회를 놓쳤을 수 있다고 말했다. 특히 “시간을 낭비하기 좋은 방법이네요. 정말 잘했습니다”라는 비꼬는 무전은 전략적 이견을 수면 위로 끌어올렸다. 즉시 더 빠른 페이스와 더 신선한 타이어를 가진 드라이버, 그리고 챔피언십에서 더 앞선 드라이버를 페라리가 얼마나 신속하게 지원해야 하느냐가 논란이 됐다. 17
해밀턴은 이후 자신의 무전과 인터뷰가 자신에게 “최선의 모습”은 아니었다고 인정했다. 그러면서도 페라리가 이런 상황을 더 효율적으로 처리해야 한다는 입장은 유지했다. 17
전 페라리 드라이버 장 알레시는 해밀턴의 태도에 더 비판적이었다. 그는 경기 중 압박감과 감정이 격해질 수 있다는 점은 인정하면서도, 팀 라디오와 경기 후 발언으로 불만을 공개적으로 표출한 방식은 페라리에 대한 존중이 부족했다고 지적했다.
전 페라리 엔지니어 롭 스메들리의 평가는 운영 측면에 초점을 맞췄다. 보도된 사후 분석에 따르면 그가 본 핵심 문제는 페라리의 망설임이었다. 해밀턴이 확실한 페이스와 타이어 우위를 확보했다면 팀이 결정을 분명하게 내려야 했고, 지연으로 두 드라이버 모두 시간을 잃게 해서는 안 됐다는 취지다. 2
잔드보르트 이후 챔피언십 구도
네덜란드 그랑프리 뒤 해밀턴은 드라이버 챔피언십 3위에 올랐으며, 선두 안토넬리와의 격차는 59점이었다. 르클레르는 5위로 해밀턴보다 28점 뒤, 안토넬리보다 87점 뒤에 자리했다. 8
이 격차는 페라리의 전략을 어렵게 만든다. 두 드라이버를 똑같이 대하는 것은 팀이 강조해 온 공정성을 지켜주지만, 매 레이스마다 동일한 원칙만 고수하면 더 빠른 차와 더 신선한 타이어를 가진 드라이버, 또는 타이틀 경쟁에서 더 유리한 드라이버가 기회를 잃을 수 있다.
왜 몬차에서 페라리의 원칙이 시험받나
페라리의 홈 레이스인 이탈리아 그랑프리는 9월 4~6일 몬차에서 열린다.
페라리가 반드시 한 명을 영구적인 ‘넘버 원’ 드라이버로 선언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잔드보르트와 같은 상황에서는 기준이 필요하다. 챔피언십 순위가 더 높은 드라이버를 우선할지, 당일 페이스가 더 좋은 드라이버를 지원할지, 아니면 상황이 바뀌어도 당초 레이스 플랜을 유지할지를 정해야 한다.
메르세데스의 결정은 팀오더를 신속하게 내리고, 이후 그 손익을 설명하는 방식이 어떤 결과를 낳는지 보여줬다. 반대로 페라리의 지연은 두 차량이 시간을 잃는 동안 팀의 원칙이 정리되지 않았을 때 어떤 대가를 치르는지 드러냈다. 몬차에서는 해밀턴을 우선하는 선택과 두 드라이버에 대한 동등 대우 중 어느 쪽을 택하든, 페라리의 홈 관중이 그 결정을 예리하게 지켜볼 전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