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유는 흐르는데 연료는 부족한 ‘이상한’ 시장
현재 석유시장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원유와 완제품 가격 사이의 격차가 커졌다는 점이다. 8월 북해산 데이티드 원유는 배럴당 약 92달러에 거래됐지만, 디젤·휘발유·항공유의 정제마진은 여전히 사상 최고 수준에 가까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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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르웨이 스타방에르에서 열린 ONS 에너지 콘퍼런스에서 패트릭 푸야네 TotalEnergies 최고경영자는 이를 ‘약세인 원유시장’과 ‘강세인 정제유시장’이 공존하는 상황이라고 표현했다. 그의 설명은 간단했다. 원유는 여전히 호르무즈 해협을 통과하고 있지만, 운임·보험·경비 등 비용이 급등하면서 정제유는 같은 경로로 운송하기가 경제적으로 어려워졌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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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ael Sawan Shell 최고경영자는 정제유 시장을 압박하는 요인을 ‘세 가지 위협’으로 요약했다. 우크라이나의 러시아 정유시설 공격, 페르시아만 해상의 선박 운항 위험, 홍해 운송 차질이다.
땅속 원유보다 부족한 것은 ‘도착 가능한 연료’
이번 사태는 지하에 원유가 얼마나 남아 있는지만으로 설명하기 어렵다. 원유와 정제유는 서로 다른 선박과 유통망을 이용하기 때문이다.
초대형 원유 운반선은 약 200만 배럴에 달하는 대규모 화물을 싣고 운항한다. 보험료와 경비, 항해 비용을 많은 물량에 나눠 부담할 수 있어 위험 비용이 올라도 운송이 성립할 여지가 있다. 반면 청정석유제품 운반선은 훨씬 적은 양을 싣는다. 같은 위험 할증료가 붙어도 배럴당 부담이 더 커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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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결과 원유 운송은 계속되는데 디젤이나 휘발유 운송은 손익분기점을 넘지 못하는 상황이 생긴다. 시장에 원유 화물이 남아 있어도 정유공장과 소비자가 있는 지역에 필요한 연료가 도착하지 않는 ‘물리적 유통’ 문제가 발생하는 이유다.
러시아 정유시설 공격이 디젤 공급을 조인다
우크라이나의 드론 공격으로 러시아의 정유 처리량은 최근 몇 달 동안 약 30% 줄어 하루 400만 배럴 아래로 떨어졌다. 러시아는 7월 디젤 수출도 금지했다.
러시아의 해상 석유제품 수출량은 7월 전월보다 약 3분의 1 감소해 약 390만 톤에 그쳤다. 정유 생산 감소와 수출 제한이 동시에 반영된 결과다.
푸야네 CEO가 우크라이나의 드론 공격으로 러시아 연료 공급이 하루 300만~350만 배럴 감소했다고 추산했다는 보도도 나왔다. 다만 이 수치는 영구적으로 가동을 멈춘 정유능력의 검증된 규모라기보다, 차질을 빚은 연료 공급과 시장에서 이용 가능한 물량의 광범위한 감소를 가리키는 추정치로 신중하게 해석할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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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유값이 내려가도 주유소 가격이 안 떨어지는 이유
휘발유와 경유 가격에서 원유는 여러 구성 요소 중 하나일 뿐이다. 정제마진, 운송비, 보험료, 지역별 재고, 특정 연료 규격의 공급 여부가 공급망에 문제가 생겼을 때 더 큰 영향을 미칠 수 있다.
유럽 저유황 가스오일 선물 가격은 7월 30일 원유보다 배럴당 74.66달러 높은 수준까지 올라 사상 최고 프리미엄을 기록했다. 유럽 항공유 정제마진도 7월 29일 배럴당 80달러를 웃돌았다. ‘크랙 스프레드’ 또는 정제마진은 정제유 가격에서 원료인 원유 가격을 뺀 차이를 뜻하며, 소비자가 주유소에서 내는 최종 가격과는 다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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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비자 입장에서 불편한 결론은 분명하다. 국제유가 기준 가격이 하락한다고 해서 휘발유나 경유 가격이 자동으로 내려가지는 않는다. ONS 콘퍼런스 관련 보도에 따르면 유럽 소비자는 높은 연료 가격에 계속 노출될 수 있고, 제품과 운송 병목이 이어지면 미국 휘발유 가격도 갤런당 4달러 아래로 내려가기 어려울 수 있다.
아시아가 큰 연료 부족분을 떠안고 있다
에너지 데이터 기업 Kpler는 8월 아시아의 경질 및 중간유분 수입량이 하루 평균 559만 배럴에 이를 것으로 추산했다. 7월의 560만 배럴과는 비슷하지만, 2월까지 3개월간 평균인 하루 708만 배럴과 비교하면 21% 적다. 하루 약 149만 배럴의 핵심 연료가 사라진 셈이다. 여기에는 디젤, 항공유, 휘발유가 포함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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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향은 국가별로 다르다. 상대적으로 소득이 낮은 연료 수입국은 다른 구매자보다 높은 가격을 제시하기 어렵고 비축 여력도 작다. 인도네시아와 필리핀 같은 국가가 더 큰 압박을 받는 이유다. 호주는 대체 화물을 확보할 여지가 더 컸지만, 비슷한 물량을 조달하는 데 훨씬 높은 가격을 치러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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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라서 위기를 호르무즈 해협을 통과한 원유 선적량만으로 판단해서는 안 된다. 가계와 항공사, 운송업체, 제조업체에 더 중요한 질문은 쓸 수 있는 형태의 정제유가 필요한 장소까지 감당 가능한 가격으로 도착하느냐는 것이다.
배럴당 71.29달러 정제마진이 보여주는 것
싱가포르의 한 정유사는 8월 21일 가스오일에서 배럴당 71.29달러의 마진을 올린 것으로 전해졌다. 한 달 전의 85.63달러보다 낮아졌지만 여전히 이례적으로 높은 수준이다. 가스오일은 디젤을 만드는 핵심 원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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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처럼 높은 마진은 시장이 보내는 강력한 신호다. 정유사들이 원유를 디젤로 바꿔 공급하는 대가로 큰 보상을 받고 있다는 것은 구매자들이 해당 제품을 시급하게 필요로 한다는 뜻이다. 원유시장은 비교적 느슨해 보여도 디젤과 기타 중간유분 시장은 극도로 팽팽할 수 있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중동 공급 차질이 이어지고, 러시아 수출 제한이 유지되며, 아시아 정유공장이 정상 가동을 회복하지 못할 경우 압박은 계속될 수 있다. 미국이 이란에 추가 제재를 부과하면 시장에서 이용 가능한 물량이 더 줄어들 가능성도 있다. 중국의 정제유 수출이 늘어나면 불균형을 완화할 수 있지만, 실제 안정을 위해서는 충분한 정유 생산량과 안전한 운송 능력이 모두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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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격이 빠르게 내려가려면
연료 가격이 단기간에 정상화되려면 여러 조건이 동시에 충족돼야 한다.
- 페르시아만과 홍해를 지나는 선박의 운항이 더 안전하고 저렴해져야 한다.
- 러시아의 정유 처리량과 석유제품 수출이 회복돼야 한다.
- 아시아를 비롯한 대체 정유시설의 생산량이 늘어야 한다.
- 고갈된 연료 재고를 다시 쌓고 선박 운항 일정을 정상화할 시간이 필요하다.
해상 안보가 개선되더라도 지역 저장탱크가 곧바로 채워지는 것은 아니다. Sawan CEO는 별도로 원유시장 전체의 균형을 회복하는 데 1년 가까이, 또는 그 이상 걸릴 수 있다고 경고한 바 있다. 첫 번째 공급 충격이 완화된 뒤에도 실물 에너지시장의 긴장이 상당 기간 이어질 수 있다는 의미다.
스타방에르에서 나온 핵심 메시지는 원유 가격이 더 이상 중요하지 않다는 뜻이 아니다. 이제 원유만이, 또는 반드시 원유가 시장의 가장 큰 제약 요인은 아니라는 뜻이다. 소비자에게 결정적인 부족분은 점점 더 운송되고, 보험에 가입되며, 필요한 시장까지 실제로 배달될 수 있는 정제유가 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