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지만 미국에 저장된 원유가 아시아와 유럽 정유사들이 걸프 지역에서 조달해야 하는 원유를 즉시 대신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미국 내 탱크에 있는 배럴과 중동에서 선적돼 보험에 가입하고 해상 운송을 거쳐 최종 구매자에게 도착해야 하는 배럴은 시장에서 같은 의미를 갖지 않는다.
당시 시장은 서로 다른 두 신호를 동시에 가격에 반영했다.
평상시라면 첫 번째 신호가 더 큰 영향력을 행사했을 가능성이 높다. 그러나 주요 해상 요충지에 차질이 발생하면 두 번째 신호가 시장을 압도할 수 있다.
분쟁 이전 호르무즈 해협은 전 세계 원유와 액화천연가스 공급량의 약 5분의 1이 통과하던 곳이다. 로이터에 따르면 전쟁 전 하루 평균 약 1,800만 배럴이던 원유·석유제품 운송량은 7월 약 480만 배럴로 감소했고, 8월에는 18일까지 하루 평균 약 200만 배럴에 그쳤다.
선박 운항도 극도로 위축됐다. 로이터는 어느 화요일 호르무즈 해협을 통과한 화물선이 6척에 불과했다고 보도했다. 이는 10일 기준 일평균 11척보다 적은 수치다. 추가 선박 피격과 미국의 대이란 압박 지속 방침이 전해지면서 해협 통항이 사실상 멈춰서는 듯한 상황이 나타났다는 보도도 나왔다.
트레이더들이 보는 문제는 원유가 지하에 얼마나 묻혀 있느냐가 아니다. 그 원유를 안전하고 경제적으로 이동시킬 수 있느냐가 더 중요하다. 선박 피격, 해군의 통항 제한, 보험료 상승, 운송 지연, 해협이 언제 안정적으로 다시 열릴지에 대한 불확실성은 명목상 공급을 실제로 인도 가능한 공급으로 바꾸는 과정을 방해한다.
이 때문에 미국 재고가 늘었는데도 WTI 가격이 쉽게 밀리지 않았다.
해상 운송 위험은 단일 사건에 그치지 않았다. 아랍에미리트(UAE)는 아부다비 국영 석유회사 ADNOC의 유조선 2척이 호르무즈 해협을 통과하던 중 공격받았다고 밝혔다. 이후 UAE는 이란과의 무역 및 금융 거래를 중단한다고 발표했다. 시장에서는 해상 운송 차질이 수로 밖의 경제·외교 관계로까지 확산될 수 있다는 우려가 커졌다.
바브엘만데브 해협과 홍해 항로도 시장의 계산에 포함됐다. 로이터는 후티 세력이 사우디아라비아 유조선을 공격했다고 밝힌 뒤 호르무즈 해협과 바브엘만데브 해협을 통과하는 선박이 모두 크게 감소했다고 전했다. 아라비아반도를 돌아가는 대체 항로 역시 더 길고 비싸거나 보험 가입이 어려울 수 있어, 완전히 신뢰할 수 있는 해법이 되지 못한다.
따라서 석유시장은 “수로가 열렸다”는 정치적 발표 자체보다 정상화의 신뢰성을 더 중요하게 보고 있다. 선박 통항과 보험이 적용된 화물 운송이 일정 기간 꾸준히 회복되는지가 일시적이거나 논란이 있는 재개방 선언보다 훨씬 의미 있는 지표다.
사우디아라비아의 동서 석유 송유관인 **페트로라인(Petroline)**은 이번 위기에서 가장 중요한 완충 장치 가운데 하나다. 약 1,200킬로미터 길이의 이 송유관은 사우디 동부 유전의 원유를 홍해 연안 얀부로 운송하며, 하루 최대 700만 배럴을 수송할 수 있다. 사우디는 수송 능력을 하루 최대 200만 배럴 추가하는 방안도 검토하고 있다.
이 경로를 이용하면 사우디는 일부 수출 물량을 호르무즈 해협 밖으로 돌릴 수 있다. 아람코도 안전과 공급 연속성을 우선하는 방향으로 선적 작업을 조정했으며, 아라비아만에 접근하기 어려운 고객을 위해 배정 물량을 얀부로 전환하는 방안을 활용했다.
그러나 페트로라인이 정상적인 호르무즈 해협 운항을 전부 대신할 수는 없다. 송유관 능력은 수출망의 한 요소일 뿐이다. 원유가 얀부에 도착한 뒤에도 저장시설, 터미널, 유조선, 보험, 그리고 홍해를 지나가는 안전한 항로가 필요하다. 따라서 원유가 호르무즈를 우회하더라도 홍해와 바브엘만데브 해협의 위험은 여전히 남는다.
페트로라인은 공급 차질을 없애는 장치라기보다 충격을 흡수하는 장치에 가깝다. 주요 요충지에 노출되는 수출 물량을 줄여주지만, 사라진 모든 운송량을 복구하거나 위험 프리미엄을 없애지는 못한다.
명목상 여유 생산능력은 가격 급등의 규모와 기간을 제한할 수 있다. 다만 추가 생산된 원유가 실제 구매자에게 도착할 수 있을 때만 효과가 나타난다. 유전에서 생산량을 늘리려면 가동 중인 송유관, 수출 터미널, 선박, 보험, 개방된 해상 항로가 모두 필요하다.
이 차이는 운송 위기에서 특히 중요하다. 유정에서 생산할 수 있는 추가 물량이 해상 병목 뒤에 갇힌 화물을 즉시 보충해주지는 못한다. 운송 여건이 정상화되면 여유 생산능력의 안정화 효과가 커지지만, 선박이 지연되거나 공격받는 동안에는 단기 영향이 제한적이다.
OPEC+의 하루 400만 배럴을 웃도는 명목상 여유 생산능력도 같은 한계를 가진다. 생산 여력은 가격 상승을 억제하는 안전판이 될 수 있지만, 안전한 수송망이 없다면 곧바로 시장에 공급되는 원유와 같지 않다. 미국의 높은 생산량과 재고 증가 역시 WTI의 기초 수급에는 부담이지만, 국제시장에서 부족한 중동산 원유의 인도 문제를 자동으로 해결하지는 못한다.
단기적으로 원유시장은 뉴스에 민감한 흐름을 이어갈 가능성이 크다. 추가 선박 공격, 운송 제한 강화, 외교 협상 실패가 발생하면 가격이 급등할 수 있다. 반대로 호르무즈와 바브엘만데브 해협을 통한 상업 운항이 지속적이고 검증 가능한 방식으로 회복되면 위험 프리미엄이 상당 부분 사라지고, 미국 재고 누적이라는 약세 재료가 WTI를 다시 압박할 수 있다.
미국 에너지정보청(EIA)은 2026년 2분기 중동산 원유 및 석유제품 운송 차질이 원유 가격 상승과 변동성 확대에 기여했다고 밝혔다. 구매자들이 대체 공급원을 찾으면서 미국 정유 마진과 생산량, 수출도 증가했다는 설명이다.
결국 핵심은 간단하다. 미국 재고는 한 시장 안에 물리적으로 원유가 얼마나 있는지를 보여주지만, 호르무즈 해협의 차질은 그 원유가 세계 각지로 제때 배달될 수 있는지를 위협한다. 생산능력이 충분하다는 사실만으로는 부족하다. 선박 운항, 해상 보안, 보험 조건이 함께 정상화될 때까지는 인도 위험이 예상보다 큰 미국 재고 증가를 계속 압도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