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변화가 유럽 시장이 당장 러시아 시장을 완전히 대체한다는 뜻은 아니다. 수출처를 바꾸려면 새로운 물류망과 품질 기준, 구매자, 금융 지원이 필요하다. 다만 러시아의 제한 조치가 진공 속에서 작동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은 분명해졌다. 아르메니아에는 또 다른 주요 시장이 있고, EU는 아르메니아가 그 시장에 접근하도록 지원하고 있다.
EU는 7월 아르메니아에 1,800만 유로의 추가 경제 지원을 약속하고 일부 아르메니아산 제품의 수출 규정을 완화했다. EU의 보다 포괄적인 ‘회복력·성장 계획’ 규모는 2억7,000만 유로로, 에너지와 교통, 민간 부문을 포함한 개혁과 투자, 협력을 지원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유럽연합 집행위원회는 러시아의 무역 제한으로 발생한 혼란에 대응해 아르메니아산 제품에 한시적인 무역 자유화 조치를 적용하는 방안도 제안했다.
여기에는 자기강화적 흐름이 만들어진다. 러시아의 압박이 커질수록 유럽의 지원 가치는 높아지고, 유럽의 지원이 확대될수록 아르메니아는 러시아의 압박을 견디며 다변화를 추진하기 쉬워진다.
파시냔 총리가 7월 푸틴 대통령과 통화한 사실은 아르메니아가 러시아와의 경제적 관계를 끊지 않았다는 점을 보여준다. 파시냔은 아르메니아산 수출품에 영향을 미치는 제한 조치를 해결하는 데 러시아 대통령이 도움을 줄 것을 요청했다. 동시에 해당 조치가 양국 협정을 위반하고 EAEU의 법적 틀에도 어긋난다고 주장했다.
이는 깔끔한 지정학적 결별과는 거리가 있다. 아르메니아는 러시아 시장에 대한 접근을 유지하려 하면서도, 그 접근권이 정치적 동조를 조건으로 해서는 안 된다는 입장이다. 예레반은 EAEU 규정을 근거로 분쟁을 제기함으로써 러시아의 조치를 유럽 통합에 따른 정당한 대응으로 받아들이기보다, 제도적 약속을 위반한 행위로 규정하고 있다.
이 호소는 두 가지 사실을 동시에 보여준다.
아르메니아는 고립을 줄일 방법을 EU 밖에서도 찾고 있다. 파시냔 정부의 2026~2031년 국정 프로그램에는 아제르바이잔 및 튀르키예와의 관계 정상화가 포함됐다. 아르메니아와 튀르키예 당국자들은 국경 개방을 진전시킬 수 있을 정도로 대화가 진전됐다고 설명해 왔으며, 양국은 직접 교역을 확대하기 위한 조치도 취했다.
아르메니아와 튀르키예의 관계가 본격적으로 열리면 새로운 운송로와 상업적 연결망이 생길 수 있다. RANE 분석가들은 해빙이 아르메니아의 대러 의존도를 어느 정도 낮출 수 있다고 평가하면서도, 러시아의 강압이 그 과정을 제약할 수 있다고 분석했다.
핵심은 러시아의 영향력이 아르메니아와 모스크바 사이의 경제적 연계뿐 아니라, 아르메니아가 선택할 수 있는 지역적 대안이 제한적이었다는 사실에서도 힘을 얻어왔다는 점이다. 튀르키예 및 아제르바이잔과의 관계가 개선되면 아르메니아는 교역과 연결망을 더 많이 다변화할 여지를 갖게 된다. 이것이 러시아의 영향력을 없애지는 않겠지만, 모스크바가 역내에서 반드시 거쳐야 하는 중개자라는 지위는 약화시킬 수 있다.
모스크바가 제시한 ‘선택’ 프레임은 러시아에도 딜레마를 안긴다. 아르메니아가 EU와의 관계 강화를 추진하면서 EAEU 회원국 지위를 유지하도록 용인하면, 러시아가 공개적으로 양립 불가능하다고 주장해 온 제한적 병행 노선을 사실상 받아들이는 모양새가 된다. 반대로 아르메니아를 축출하면 결별을 공식화하고 중요한 제도적 영향력 통로를 스스로 포기하게 된다.
따라서 분석가들은 완전한 축출보다 긴장된 공존이 계속될 가능성을 더 높게 본다. 카네기 국제평화재단은 파시냔의 선거 승리 이후에도 아르메니아의 점진적인 유럽 편향이 계속되겠지만, 양측 모두 협력에서 이익을 얻고 있기 때문에 당장 러시아와 결별하지는 않을 것으로 평가했다.
이 지점에서 러시아의 선택지는 좁아진다. 무역 제한은 아르메니아 생산자에게 타격을 줄 수 있지만, 동시에 다변화를 더욱 시급한 과제로 만든다. 정치적 위협은 예레반의 대응을 이끌어낼 수 있지만, 모스크바에 대한 의존을 줄여야 한다는 국내 논리를 강화할 수도 있다. 아르메니아를 축출하면 러시아가 영향력 행사에 활용하려는 바로 그 EAEU 틀을 없애게 된다.
페스코프의 메시지는 아르메니아의 선택을 ‘유럽 아니면 EAEU’라는 양자택일로 만들려는 것이다. 그러나 아르메니아는 기존 경제 관계를 유지하면서 EU와 가까워지고, 주변국과의 새로운 연결망도 열어두려 하고 있다.
이런 균형 전략이 영원히 지속될 수는 없다. EU와 EAEU의 관세 체계가 구조적으로 양립하기 어렵다는 점은 푸틴 대통령도 지적했다. 하지만 러시아의 경제적 압박은 아르메니아가 더 독립적인 선택을 할 수 있는 조건을 오히려 빠르게 조성하고 있을 가능성이 있다.
러시아는 여전히 비용을 부과할 수 있고, 아르메니아의 유럽행도 아직 불확실하다. 7월 보도에 따르면 아르메니아는 아직 EU 회원 가입을 공식 신청하지 않았다. 따라서 러시아의 현재 위치를 ‘무관한 존재’라고 표현하는 것은 정확하지 않다. 더 적절한 표현은 영향력의 효과가 줄어들고 있다는 것이다. 모스크바는 여전히 수단을 갖고 있지만, 그 수단은 점점 더 많은 비용을 요구하고 신뢰성이 낮아지며, 과거의 동맹국을 러시아가 거부하길 바라는 대안 쪽으로 밀어내는 역효과까지 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