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 주요 완성차 시장은 폭발적인 전기차 수요를 경험했습니다. 2026년 3월, 유럽 대륙 15개국의 순수 배터리 전기차(BEV) 신규 등록 대수는 전년 동기 대비 51% 급증한 22만 4천 대에 달했습니다. 이는 해당 시장에서 팔린 전체 신차 5대 중 1대 이상(점유율 22%)이 전기차였음을 의미합니다 .
이러한 폭발적인 증가세는 단발적이지 않았습니다. 2026년 1분기 유럽 주요 시장의 전기차 판매량은 약 33% 증가했고, 첫 4개월 동안 유럽 전역의 순수 전기차 판매량은 약 29% 늘어나 100만 대에 육박했습니다 . 로이터 통신의 집계에 따르면 전 세계 37개국에서 2026년 3월 전기차 판매량이 사상 최고치를 경신했으며, 2026년 4월에도 전년 동기 대비 34% 증가하는 견조한 흐름을 이어갔습니다
.
눈여겨볼 점은 신차뿐 아니라 중고차 시장의 반응이었습니다. 영국, 독일, 프랑스, 스페인의 온라인 자동차 플랫폼들은 이란 전쟁 발발 후 내연기관 차량을 팔고 전기차로 갈아타려는 소비자들의 검색과 문의가 급증했다고 밝혔습니다 .
프랑스의 중고차 플랫폼 아라미스오토(Aramisauto)는 전기차 판매 비중이 3주 만에 65%에서 127%로 거의 두 배 가까이 뛰었다고 보고했습니다 . 노르웨이의 핀(Finn)에서는 전기차가 디젤 모델을 제치고 플랫폼 내 가장 많이 팔리는 연료 타입으로 올라섰습니다
.
이 거대한 전기차 전환의 물결 한복판에 프랑스 완성차 업체 르노(Renault)가 있습니다. 르노 그룹의 프랑수아 프로보(François Provost) CEO는 로이터 통신과의 인터뷰에서 이란 전쟁 발발 이후 프랑스와 독일 시장에서 전기차 주문량이 50%나 급증했다고 밝혔습니다 .
프로보 CEO는 "높은 연료비가 전기차에 대한 관심을 촉발시켰다"며, 현재 전기차 수요가 공급 능력을 초과하고 있다고 설명했습니다 . 그는 배터리 공급망에 당장 큰 문제는 없지만, 폭주하는 주문을 맞추기 위해 르노가 추가 생산 교대 근무에 돌입했다고 확인했습니다
.
르노 전기차 생산의 심장부인 프랑스 북부 두에(Douai) 공장(르노 일렉트리시티의 핵심 거점)은 이미 하루 900대의 전기차를 생산하며 풀가동되고 있습니다. 이곳에서 생산되는 르노 5 E-테크(Renault 5 E-Tech)는 출시된 지 불과 15개월 만에 10만 대 생산을 돌파하며 유럽 전기차 시장의 '히트 상품'으로 자리 잡았습니다 .
르노 5 E-테크의 질주는 숫자가 증명합니다. 2025년 한 해 동안 프랑스에서만 3만 7,997대가 등록되며, 1만 9,207대에 그친 테슬라 모델 Y를 큰 차이로 제치고 프랑스 전기차 판매 1위에 올랐습니다 . 이는 2025년 마지막 6개월 중 5개월 동안 프랑스 베스트셀링 전기차 자리를 지킨 대기록입니다
.
이러한 성공은 르노의 유럽 시장 공략에 날개를 달아주었습니다. 르노의 유럽 내 전기차 판매량은 2025년에만 72% 급증했고, 르노 5 E-테크는 유럽 B세그먼트(소형 해치백) 전기차 시장에서도 단연 1위를 차지했습니다 .
프로보 CEO는 이란 분쟁이 종식되고 유가가 안정되면 현재의 폭발적인 수요가 다소 진정될 수 있다고 인정하면서도, 구조적인 전기차 전환 추세는 지속될 것이라고 강조했습니다 . 이러한 낙관론의 배경에는 에너지 안보라는 더 큰 그림이 자리합니다. 자동차 연료를 전적으로 수입 원유에 의존하는 구조에서 벗어나, 자국에서 생산한 전기로 달리는 전기차로의 전환은 이제 유럽 소비자와 정부 모두에게 '돈'과 '안보'의 문제가 되었습니다.
폭증하는 수요를 값비싼 '반짝 특수'로 끝내지 않기 위해 프로보 CEO는 두 가지 카드를 적극적으로 추진하고 있습니다.
프로보 CEO는 전기차 가격을 낮추고 대중 시장에서의 채택을 넓히기 위해, 현재 르노 두에 공장 옆에 세워진 엔비전 AESC(Envision AESC) 배터리 기가팩토리에서 값싼 LFP(리튬인산철) 배터리 셀 공급을 확대해야 한다고 강력히 주문하고 있습니다 .
현재 9GWh 규모로 운영 중인 엔비전 AESC 두에 공장은 향후 30GWh로 증설될 경우 유럽 최대 배터리 생산 거점 중 하나가 될 전망이며, 2026년 하반기 약 20억 유로 규모의 증설 투자 결정이 예상됩니다 . 프로보 CEO의 구상은 이 공장에서 나오는 저렴한 LFP 배터리를 통해 2만 5천 유로 수준의 합리적인 전기차를 지속적으로 공급함으로써 수요를 장기적인 판매 성장으로 이어가겠다는 것입니다.
또 하나의 뜨거운 감자는 중국 전기차 업체들을 향한 견제구입니다. 프로보 CEO는 유럽연합(EU)이 중국 자동차 제조사들에게 단순 조립을 넘어 유럽 현지에서 부품을 더 많이 조달하도록 의무화해야 한다고 공개적으로 촉구했습니다. 그는 차량 한 대당 평균 60% 수준의 현지 부품 의무화 방안을 지지한다고 밝혔습니다 .
이는 EU가 현재 준비 중인 '산업 가속기 법안(Industrial Accelerator Act)' 과 맞물려 있습니다. 이 법안 초안에는 EU 보조금을 받는 전기차가 배터리를 제외한 부품의 70%를 역내에서 조달해야 한다는 조건이 담겨 있습니다 . 이는 보조금을 등에 업고 유럽 시장을 빠르게 잠식하고 있는 값싼 중국산 전기차에 대한 강력한 방어책이 될 전망입니다.
하지만 르노는 75% 수준의 지나치게 높은 현지 부품 비율은 현실적이지 않다고 보고 있습니다. 배터리 등 핵심 부품을 여전히 아시아에서 상당 부분 조달받는 상황에서 무리한 규제는 오히려 유럽 업체들의 발목을 잡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
이란 전쟁이라는 외부 충격이 유럽 전기차 시장에 불러온 변화는 단순한 단기 호황 이상의 의미를 지닙니다. 유럽 소비자들이 ℓ당 2유로에 육박하는 휘발유 가격표를 보며 느꼈을 경제적 충격과, 전기차를 충전할 때 ℓ당 1,200원 수준의 비용으로 100km를 달릴 수 있다는 계산 사이의 괴리는 돌이킬 수 없는 전환을 만들고 있습니다 .
프로보 CEO 체제의 르노는 이 역사적인 변곡점을 놓치지 않으려 하고 있습니다. 당장의 폭증하는 수요를 감당하기 위해 공장을 풀가동하는 한편, 값싼 배터리로 무장한 대중 전기차를 계속 쏟아내고 EU를 움직여 중국과의 경쟁에서 유리한 게임의 룰을 만들고자 합니다. 전쟁이 끝나더라도, 일단 전기차의 경제성과 편리함을 경험한 소비자들이 다시 주유소로 돌아가기는 쉽지 않을 것입니다.
Comments
0 commen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