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가르드 총재가 말하는 ‘분열(fragmentation)’이란, 미국 주도의 무역 정책 변화와 지정학적 갈등이 심화되며 다자간 협력 질서가 약해지고 각국이 보호무역주의 혹은 자국 우선주의로 회귀하는 현상을 뜻한다. 그녀는 이러한 글로벌 환경의 변화에 유럽이 수동적으로 대응해서는 안 되며, 오히려 더 적극적인 무역 통합을 추진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
라가르드 총재는 유로화가 진정한 글로벌 통화로 발돋움하기 위한 조건으로 구조 개혁을 가장 강조했다. 구체적으로 그녀는 유럽이 자본시장을 완전히 통합(자본시장연합, Capital Markets Union)하고 은행연합(Banking Union)을 완성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러한 개혁이 이뤄져야 유럽 경제의 생산성과 경쟁력이 높아지고, 유로화의 국제적 활용도를 더욱 끌어올릴 수 있다는 것이다 .
보고서 발표와 함께 열린 기자회견에서 라가르드 총재는 달러 가치 변화에도 주목했다. ECB는 2025년 3월 이후 유로화 대비 달러 가치가 눈에 띄게 하락했음을 관찰했다고 밝혔다 . 이는 글로벌 금융 위기나 지정학적 충격 때마다 반복되던 현상으로, 국제 통화 시스템의 핵심인 달러의 지배력에 대한 불확실성이 커질 때마다 유로화가 반사이익을 보는 것이다.
ECB 고위 관계자들은 이러한 달러 약세가 유로화의 국제적 역할을 확대할 기회를 제공할 수 있다고 진단한다. 그러나 이는 자동으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유럽이 구조 개혁이라는 숙제를 완수할 때만 가능한 시나리오다 .
현재 유럽이 직면한 가장 큰 구조적 문제는 AAA 및 AA 등급의 유럽 국채 시장 규모가 약 6.6조 유로에 불과해, 미국 국채 시장의 5분의 1에 지나지 않는다는 점이다. 유럽 주식 시장 규모 역시 미국의 절반에 불과하고 자본 배분 효율성도 낮아, 2009년 이후 주식 시장 수익률은 미국 대비 5분의 1 수준에 그쳤다. 라가르드 총재는 이런 근본적인 체력 차이를 극복하지 않고서는 유로화가 달러의 아성에 도전할 수 없다는 점을 분명히 한 것이다.
결국 이번 ECB 보고서는 유로화가 '지속가능 금융'이라는 틈새 시장에서 가능성을 증명했지만, 국제 통화 패권을 둘러싼 더 큰 게임에서 승자가 되기 위해서는 유럽 내부의 단단한 결속과 과감한 개혁이 뒷받침되어야 한다는 엄중한 메시지를 던지고 있다.
Comments
0 commen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