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전자가 AI 메모리 공급 부족에 대응하는 방식은 단순한 ‘웨이퍼 투입량 늘리기’가 아니다. 회사는 6세대 10나노급인 1c DRAM 전환, 수율 개선, 생산성 향상에 무게를 두고 있다. 명목상 생산능력을 빠르게 키우기보다, 기존 팹에서 실제로 판매 가능한 HBM4 물량을 늘리겠다는 전략이다.
겉으로 보면 삼성전자의 증설 계획은 다소 보수적이다. 하지만 이는 대규모 투자에 앞서 기존 생산라인을 더 높은 집적도와 수익성을 갖춘 메모리 생산으로 전환하려는 계산된 선택일 수 있다.
2026년 이후 삼성의 웨이퍼 증가는 둔화
시장조사업체 옴디아 자료를 바탕으로 한 조선비즈 보도에 따르면 삼성전자의 연간 DRAM 생산능력은 2025년 약 769만5000장, 2026년 817만5000장, 2027년 828만 장으로 예상된다. 2026년 증가율은 약 6%지만, 2027년에는 약 1.3%로 급격히 낮아진다. 2
여기서 말하는 수치는 웨이퍼 기준 생산능력이다. 완성된 HBM 패키지 수나 삼성전자가 실제로 판매할 수 있는 메모리 비트 수를 뜻하지는 않는다. 따라서 웨이퍼 투입량만 비교하면 공정 전환의 효과를 충분히 반영하기 어렵다. 더 작은 공정에서 양품을 안정적으로 생산한다면, 웨이퍼 한 장에서 얻는 메모리 비트와 고부가 제품 수가 늘어날 수 있기 때문이다.
삼성전자가 증설을 포기한 것도 아니다. 1c DRAM 생산을 늘리기 위한 라인 전환과 장비 설치가 진행 중인 것으로 전해졌고, 2026년 HBM 생산량을 크게 확대하는 목표도 보도됐다. 35
왜 웨이퍼 수보다 수율이 중요한가
HBM4는 여러 공정의 수율이 연쇄적으로 연결되는 제품이다. 먼저 DRAM 다이를 양품으로 만들어야 하고, 이후 실리콘 관통전극(TSV) 공정, 여러 개 다이의 적층과 접합, 완성 스택의 최종 검사를 통과해야 한다. 어느 한 단계에서 문제가 생겨도 최초 웨이퍼 투입량에 비해 판매 가능한 HBM 제품 수는 크게 줄어든다. 22
수율이 낮은 공정에 웨이퍼를 대량 투입하면 재공품과 폐기물만 늘고 완성 HBM 물량은 기대만큼 증가하지 않을 수 있다. 특히 HBM4에 적용되는 1c DRAM으로의 전환은 공정 안정화라는 추가 과제를 안긴다.
또한 1c DRAM 자체의 수율과 완성된 HBM4의 실효 수율은 같은 개념이 아니다. DRAM 다이를 충분히 양산할 수 있게 됐다고 해서 다층 적층 제품인 HBM4까지 곧바로 수익성 있는 대량생산 단계에 도달했다는 뜻은 아니다. 28
삼성전자의 HBM4 수율 개선 추정치는 이 전략의 배경을 보여준다. 업계 보도에 따르면 2026년 2월 양산 초기 HBM4 수율은 60%를 밑돌았지만, 8월에는 80%에 가까워졌다. 1721 이는 회사가 공개한 전체 생산 회계가 아니라 업계 추정치지만, 명목 생산능력을 즉시 늘리는 것보다 공정을 안정화하는 편이 더 큰 효과를 낼 수 있는 이유를 설명한다.
삼성의 생산능력 우위, SK하이닉스가 빠르게 추격
같은 옴디아 기반 전망에서 SK하이닉스의 연간 DRAM 생산능력은 2025년 606만 장, 2026년 666만 장, 2027년 729만 장으로 제시됐다. 2
이를 바탕으로 계산한 삼성전자의 생산능력 우위는 다음과 같다.
- 2025년 약 163만5000장
- 2026년 약 151만5000장
- 2027년 약 99만 장
즉 삼성전자의 우위는 2026년에 곧바로 164만 장에서 99만 장으로 줄어드는 것이 아니라, 2026년 약 152만 장을 거쳐 2027년 약 99만 장으로 단계적으로 축소된다.
웨이퍼 기준으로는 여전히 삼성전자가 앞서지만, SK하이닉스의 증가 속도가 더 빠르다는 점이 중요하다. HBM 공급 경쟁에서는 생산능력만으로 승부가 결정되지 않는다. 고객 인증, 첨단 패키징 실행력, 안정적인 납품 이력이 모두 필요하다. 업계 자료는 주요 AI 고객을 대상으로 SK하이닉스가 선도적인 HBM 공급업체로 자리 잡았다고 평가하는 반면, 삼성전자는 HBM4 시장에서 입지를 회복하기 위해 수율과 고객 인증을 개선하고 있는 것으로 전해진다. 1324
AI 고객이 당장 납품 가능한 인증 물량을 우선한다면 SK하이닉스가 유리하다. 반대로 삼성전자가 1c DRAM과 HBM4 전체 수율을 끌어올리면, 상대적으로 안정적인 팹 기반에서 더 많은 판매 가능 메모리를 생산할 수 있다.
삼성 전략의 잠재적 이점
기존 팹에서 더 많은 출하량 확보
웨이퍼 한 장에서 양품 1c 다이를 더 많이 얻고 완성 HBM4 스택의 수율까지 높이면, 웨이퍼 투입량보다 빠르게 실질 출하량을 늘릴 수 있다. 이는 비트당 비용을 낮추고 이미 설치된 생산설비의 활용도를 높이는 효과로 이어질 수 있다.
메모리 업황 하락 위험 완화
증설 속도를 조절하면 메모리 사이클 정점에서 범용 DRAM 생산능력을 과도하게 추가하는 위험도 줄일 수 있다. 생산라인을 고밀도·고부가 제품으로 선별 전환하면 수요와 가격이 변할 때 생산 믹스를 조정할 여지도 남는다.
프리미엄 AI 메모리 시장 재진입
HBM4는 AI 가속기 공급망의 핵심 부품에 가깝기 때문에 전략적 중요성이 크다. 2026년 초 60% 미만이던 HBM4 수율이 같은 해 8월 약 80% 수준으로 개선됐다는 보도는 공정 학습이 삼성전자의 프리미엄 HBM 경쟁력을 강화할 가능성을 보여준다. 17
결국 목표는 단순한 웨이퍼 생산능력 확대가 아니다. 명목상 생산능력 우위를 실제로 인증된 HBM4 출하량과 수익성으로 전환하는 것이다.
공정 개선을 기다릴 때의 위험
이 전략은 실행 여유가 크지 않다. 1c 수율, HBM 조립, 고객 인증 중 하나라도 예상보다 늦어지면 삼성전자는 시간을 잃는 동안 SK하이닉스의 증설을 지켜봐야 한다. 범용 DRAM과 HBM·서버 메모리 중 어디에 생산자원과 장비를 배분할지도 부담이다.
라인 전환은 단기적으로 공급을 줄일 수 있다. 장비와 생산구역을 새로운 공정에 맞게 바꾸는 동안 가동 가능한 생산량이 감소하기 때문이다. 장기적으로는 웨이퍼당 비트 수와 생산성이 높아지더라도, 전환 기간에는 공급 부족이 오히려 심해질 수 있다.
시장 타이밍도 변수다. 삼성전자가 공정을 안정화하는 동안 AI 수요가 계속 강하면, SK하이닉스가 빠른 증설과 기존 HBM 실행력을 앞세워 계약을 확보할 수 있다. 한 번 결정된 고객 공급망을 나중에 되찾기는 쉽지 않다.
HBM 부족이 일반 DRAM으로 번지는 이유
AI 붐은 HBM만의 문제가 아니다. 메모리 업체들이 웨이퍼 생산능력, 장비, 패키징 자원, 엔지니어링 인력을 HBM과 서버용 제품에 재배분하고 있기 때문이다. 업계 보도는 이런 자원 재배치가 일반 DRAM 가격 상승을 가속했다고 설명한다. 37
트렌드포스는 일반 DRAM 계약 가격이 2026년 1분기에 전 분기 대비 9095% 상승한 뒤, 2분기에도 5863% 오를 것으로 전망했다. 46 이는 시장 전망치이지 확정된 결과는 아니지만, AI 인프라 중심의 공급 부족이 HBM을 직접 사용하지 않는 PC와 일반 서버 등으로도 번질 수 있음을 보여준다.
따라서 공급 부족은 ‘웨이퍼 생산능력을 늘리겠다’는 발표만으로 해결되지 않는다. 새 라인은 장비를 갖추고, 공정을 전환하고, 고객 인증을 통과한 뒤, 수용 가능한 수율로 실제 가동돼야 한다. 그 전까지는 AI 메모리로 생산이 이동할수록 일반 제품에 배정되는 물량이 줄어들 수 있다.
AI 하드웨어 구매자에게 미치는 영향
메모리는 이제 AI 인프라의 부품 원가를 넘어 시스템 전체의 비용과 공급 가능성을 좌우하는 요소가 됐다. 톰스하드웨어는 블룸버그 보도와 애널리스트 전망을 인용해, 엔비디아가 일부 주요 고객에게 2027년 초 출하되는 그레이스 블랙웰과 베라 루빈 시스템 가격이 15% 이상 오를 수 있다고 알렸다고 전했다. 주요 배경 중 하나로 메모리 비용 상승이 거론됐다. 32
메모리 가격이 오르면 클라우드 사업자의 설비투자 부담이 커지고, 규모가 작은 구매자의 AI 시스템 도입 비용도 높아질 수 있다. 실제 최종 가격에 미치는 영향은 시스템 구성과 공급 계약에 따라 달라지지만, 방향은 분명하다. 메모리 확보 여부가 AI 컴퓨팅의 경제성을 결정하는 핵심 변수가 되고 있다.
결론: 승부처는 웨이퍼 수가 아니다
삼성전자의 보수적인 DRAM 생산능력 증가는 수요 둔화의 신호라기보다 수율과 제품 믹스에 집중하는 전략으로 보는 편이 타당하다. 삼성전자는 더 높은 집적도의 1c DRAM과 개선된 HBM4 수율을 통해 웨이퍼 한 장에서 더 가치 있고 판매 가능한 제품을 얻으려 한다.
HBM4 수율이 계속 개선된다면 이 전략은 경제적으로 설득력을 가질 수 있다. 그러나 SK하이닉스가 더 빠르게 생산능력을 확대하고 메모리 시장 전반의 공급 부족이 이어지는 만큼 위험도 크다. 삼성전자는 공정 개선을 실제 고객 인증과 안정적인 출하로 연결해야 한다.
앞으로 주목할 지표는 삼성전자의 웨이퍼 수만이 아니다. 웨이퍼당 양품 다이 수, 완성 HBM4 스택 수율, 고객 인증 물량, 실제 출하 비트 수를 함께 봐야 한다. 이 지표들이 명목 생산능력보다 빠르게 개선된다면 삼성전자의 증설 자제는 경쟁 우위가 될 수 있다. 반대로 개선이 충분하지 않다면, 삼성전자가 가진 웨이퍼 생산능력 선두 자리는 SK하이닉스의 빠른 램프업보다 덜 중요해질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