핵심은 칩이 아니라 ‘신뢰’였다
대만은 2026년 9월 열린 SEMICON Taiwan을 단순한 반도체 전시회가 아닌, 경제와 외교를 결합한 무대로 활용했다. 메시지는 분명했다. 대만이 AI 붐에 필요한 칩을 공급할 수 있다는 데서 그치지 않고, 민주주의와 법치, 공급 약속 이행에 기반한 신뢰할 수 있는 반도체 생태계라는 점을 강조한 것이다. 이는 대만이 국제적 실무 협력을 넓히는 이른바 ‘반도체 외교’의 핵심 구상이기도 하다. 중국은 대만을 자국 영토라고 주장하며 대만의 국제 활동 확대에 반대해 왔다.
2
19
20
라이칭더 대만 총통은 대만 반도체 산업의 힘이 민주주의와 법치라는 토대 위에 세워졌다고 말했다. 해외 고객이 대만을 신뢰할 수 있는 이유는 기술력뿐 아니라, 세계 공급망에 대한 약속을 지킬 제도적 기반이 있다는 주장이다.
19
AI용 반도체와 첨단 패키징의 안정적 확보가 각국 정부와 빅테크의 과제가 된 상황에서, 대만은 제조 능력을 ‘거버넌스의 강점’과 함께 제시한 셈이다. SEMICON Taiwan은 대만의 촘촘한 반도체 클러스터와 AI 시대의 공급망 중요성을 보여주는 전시장이었다.
2
19
‘대만산’에서 ‘대만과 함께 만들기’로
대만의 전략은 모든 생산을 섬 안에만 묶어두겠다는 뜻은 아니다. AI 공급망이 커지면서 대만 기업들도 주요 해외 시장 가까이에서 생산·패키징·장비·관련 서비스를 확충해야 하는 현실을 인정했다.
그래서 나온 표현이 **‘대만과 함께 만들기(make with Taiwan)’**다. 파트너 국가가 대만 기업과 기술, 산업 네트워크를 활용해 현지 생산 역량을 구축할 수 있다는 제안이다.
2
이 방식은 해외 투자와 공급망 다변화를 통해 상업적·정치적 연결을 강화할 수 있다. 동시에 대만에는 과제가 남는다. 해외 거점을 늘리는 과정에서도 첨단 공정, 전문 인력, 산업 조정 능력 등 고부가가치 역량의 중심을 대만에 유지해야 한다는 점이다.
미국에는 대규모 투자로 답했다
가장 구체적인 카드는 미국 투자였다. TSMC는 7월 애리조나 투자에 1,000억 달러를 추가해, 미국 내 계획 투자 규모를 총 2,650억 달러로 늘렸다. 이 계획에는 첨단 반도체 제조시설 4곳 추가가 포함되며, 첨단 반도체 제조 및 패키징 시설의 총수는 12곳으로 제시됐다.
1
궁밍신 대만 경제부장은 SEMICON Taiwan에서 AI 수요를 배경으로 대만 기업들이 미국에 추가 200억 달러를 투자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미국 상무부 관계자는 이를 환영했지만, 대만 정부는 해당 금액을 뒷받침할 기업과 개별 사업을 공개하지 않았다. 따라서 이는 확정된 세부 사업 목록이라기보다 향후 투자 계획으로 보는 것이 적절하다.
18
이는 미국과 대만의 더 큰 무역·투자 교환 구도와도 맞닿아 있다. 2026년 1월 합의 관련 보도에 따르면, 미국은 대만산 상품 관세를 15%로 낮추는 대신 수천억 달러 규모의 투자를 받기로 했다.
3 대만 기업의 미국 생산 확대는 워싱턴의 산업정책 우선순위에 부응하는 동시에, 양측 모두가 반도체 협력의 지속에 더 큰 이해관계를 갖게 만드는 효과를 노린다.
유럽으로 넓히는 두 번째 협력 축
대만은 미국뿐 아니라 유럽과의 관계 확대에도 SEMICON을 활용했다. 유럽연합 집행위원회가 2026년 6월 제안한 **칩스법 2.0(Chips Act 2.0)**은 유럽 반도체 산업을 강화하고, 전략적 의존도를 낮추며, EU 내 첨단 반도체 생산을 지원하는 데 목적을 둔다. 집행위는 대만과의 반도체 대화도 정책 의제에 포함하고 있다.
17
유럽의 관심사는 공급망 회복력과 반도체 역량 접근성 확대다. 대만의 관심사는 더 넓고 지속적인 경제 협력망을 구축하는 데 있다. 로이터는 유럽연합 집행위원회 관계자가 SEMICON Taiwan에 참석했으며, 유럽이 대만 기업의 추가 투자를 기대하고 있다고 보도했다.
20
미국과 유럽의 접근법이 완전히 같지는 않다. 그러나 두 지역 모두 AI 시대 공급망의 취약성을 줄이고 싶어 하며, 대만은 이 수요를 장기적 협력 관계로 전환하려 한다.
SEMICON이 보여준 대만의 계산법
SEMICON Taiwan이 대만의 지정학적 취약성을 해소한 것은 아니다. 중국은 대만의 국제적 역할 확대에 근본적으로 반대하는 입장을 유지하고 있다.
20
다만 대만은 AI 인프라에 필수적인 반도체 공급망의 신뢰도 높은 기여자가 됨으로써, 자신을 고립시키는 비용을 높이려 하고 있다. 이 전략은 세 가지 축으로 정리할 수 있다.
- 신뢰: 민주주의와 법치가 공급 약속을 지킬 수 있는 제도적 기반이라는 주장이다.
19
- 공동 생산 역량: 미국 투자와 해외 협력으로 AI 공급망의 산업적 이익을 파트너와 나누겠다는 신호다.
1
18
- 지속적인 중심성: 생산 거점이 세계로 분산되더라도, 대만은 산업 네트워크·전문성·첨단 공급망 조정 능력에서 대체하기 어려운 중심으로 남겠다는 구상이다.
2
결국 ‘대만과 함께 만들기’는 해외 협력을 확대하면서도 대만의 전략적 중요성을 약화시키지 않으려는 균형 전략이다. 대만이 SEMICON에서 판매한 것은 단지 AI 칩이 아니라, AI 공급망이 의존할 수 있는 파트너라는 역할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