즉, 외교적 진전이 있더라도 실제 물류가 정상화되지 않는 한 시장의 공급 불안은 쉽게 해소되지 않는 상황이다.
중동 위기가 구리 가격에 영향을 미치는 또 다른 경로는 ‘황산’이다.
황산은 구리 생산 공정에서 핵심적인 화학 물질이다. 특히 저품위 광석을 처리하는 용매 추출(SX)과 전해 채취(EW) 공정에서는 대량의 황산이 필요하다.
만약 해상 운송 차질로 황이나 황산의 공급이 줄어들면, 광산에서 구리를 정제하는 과정 자체가 병목에 걸릴 수 있다.
골드만삭스는 호르무즈 해협 운송 차질이 장기화될 경우 황산 공급이 타이트해지면서 구리 생산이 영향을 받을 수 있다고 경고했다. 여기에 중국이 황산 수출을 제한하는 정책까지 더해지면 글로벌 구리 정제 공급망이 더욱 압박을 받을 수 있다는 분석이다.
결국 유조선과 해상 운송 문제에서 시작된 지정학적 위기가 화학 원료 공급을 통해 구리 생산까지 영향을 줄 수 있다는 뜻이다.
하지만 구리 가격 상승을 단순히 지정학적 리스크만으로 설명하기는 어렵다.
더 큰 흐름은 구조적 수요 증가다.
구리는 전기화(electrification)의 핵심 금속이다. 전력망 확장, 재생에너지 설비, 전기차, 배터리 인프라 등 대부분의 에너지 전환 프로젝트에 대량의 구리가 필요하다.
여기에 최근에는 AI 데이터센터 확장이 새로운 수요층으로 등장했다. 대형 데이터센터와 이를 지원하는 전력 인프라 구축에는 대규모 전력 케이블과 냉각 시스템, 변전 설비가 필요하며, 이 과정에서 구리 사용량이 크게 늘어난다.
실제로 최근 산업 금속 상승세는 단순한 중동 리스크를 넘어, AI 경쟁과 인프라 투자 확대라는 구조적 요인과 연결되어 있다는 분석이 나오고 있다.
이 때문에 평화 협상 기대감으로 단기 조정이 나타나더라도 구리 가격은 쉽게 크게 떨어지지 않는 모습이다.
구리 선물 가격은 5월 중순 파운드당 약 6.65달러로 사상 최고치를 기록한 뒤 소폭 하락했지만 여전히 역사적으로 매우 높은 수준에 머물러 있다.
중동 긴장에 따른 에너지 가격 상승과 공급 불확실성이 생산 비용과 시장 기대를 동시에 높이고 있기 때문이다.
이처럼 구리는 현재 글로벌 시장에서 가장 주목받는 산업 원자재 중 하나로 자리 잡았다.
대형 투자은행들은 단기 전망에서는 의견이 다소 갈리지만, 변동성이 큰 시장이 이어질 것이라는 점에는 대체로 동의한다.
골드만삭스(Goldman Sachs) 는 비교적 신중한 입장이다. 이 은행은 2026년 글로벌 구리 시장이 공급 초과 상태로 전환될 가능성이 있다고 보고 있으며, 올해 평균 가격을 톤당 약 12,650달러로 전망한다.
다만 호르무즈 해협 운송 문제나 황산 공급 부족 같은 변수는 여전히 구리 생산을 압박해 일시적인 가격 급등을 만들 수 있다고 지적했다.
반면 UBS 는 보다 강한 상승 전망을 유지하고 있다. UBS는 공급 제약과 전력·인프라 수요 증가를 이유로 2027년 초 구리 가격이 톤당 약 15,000달러까지 상승할 수 있다고 예상한다.
만약 미국과 이란이 안정적인 합의를 이루고 호르무즈 해협 해상 운송이 정상화된다면 단기적으로는 몇 가지 변화가 예상된다.
하지만 이런 변화가 구리 시장의 장기 상승 요인을 없애지는 않는다.
전 세계적으로 전력망 투자, 재생에너지 확대, 디지털 인프라 구축이 동시에 진행되고 있기 때문이다.
현재 구리 가격 상승은 단일 요인으로 설명하기 어렵다.
중동 지정학 위기와 해상 운송 차질, 황산 공급 위험이 단기적인 공급 압박을 만들고 있다. 동시에 전력망 확장, 청정에너지 전환, 그리고 AI 데이터센터 경쟁이 장기적인 수요 증가를 만들어 내고 있다.
따라서 지정학적 긴장이 완화되더라도 구리는 앞으로 수년 동안 세계 경제에서 가장 전략적으로 중요한 원자재 중 하나로 남을 가능성이 크다.